책소개
“우리는 언제나 물질이었다”
물질과 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정치학
“물질은 늘 고정되어 있고, 수동적이며, 무력하다.” 이러한 생각에 제인 베넷은 반대한다. 물질은 특정한 관계를 구성함으로써 자체적 역량을 발휘하는 행위자이며,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서 항상 인간을 놀라게 한다. 축축한 비, 뜨거운 뙤약볕, 심지어 덜그럭거리는 금속조차 고유하게 생동한다.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은 물질이 지닌 행위성을 올곧게 파악하려 하는 철학적·정치적 기획으로, 물질과 그 배치에 내재한 비결정성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생명 현상을 설명하려 하는 세련된 유물론이다.
생기적 유물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그 자체를 뒤흔드는 데 있다. 인간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비인간이었고, 거꾸로 비인간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인간의 손을 탄’ 비인간이었다. 바로 우리 자신이 활기찬 사물이자 언제나 이미 물질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경험은 새로운 정치를 상상하고 실험하게 만든다.
이 책은 ‘이야기’, ‘행위성’, ‘배치’, ‘생명’, ‘생기론’, ‘의인화’, ‘정치생태학’, ‘정동’, ‘인간’, ‘책임’ 등 열 가지 키워드로 생기적 유물론의 철학적·정치적 기획을 자세히 살핀다. 기후 위기의 시대, 사물·비인간·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틀 지으며 공생의 토대를 마련하는 정치생태학의 혁신이 여기에 있다.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 )
미국의 정치이론가. 존스홉킨스대학교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생태철학, 예술과 철학, 미국 정치사상, 정치적 수사학, 동시대 사회 이론을 집대성해 생기적 유물론을 주창한 대표적 학자다. 생기적 유물론은 신유물론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학계는 물론 예술계와 언론의 큰 관심을 받으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표 저서로 헤겔과 환경 문제 그리고 정치를 다룬 ≪믿음과 계몽을 생각하지 않기≫(1987), 생기적 유물론의 핵심을 집약한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2010), 그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현대적 삶의 황홀함: 유착, 교차 그리고 윤리≫(2001), 최근작인 ≪유입과 유출: 월트 휘트먼과 함께 쓰기≫(2020)가 있다.
200자평
제인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은 물질의 행위성을 포착한다. 물질은 수동적이고 무력하기는커녕 특정한 배치 속에서 자체적 역량을 발휘하는 행위자로, 오히려 언제나 다소간 놀랍게 작용한다. 즉, 물질은 고유하게 생동한다. 이 책은 생기적 유물론의 철학적·정치적 기획을 열 가지 키워드로 자세히 살핀다. 사물·비인간·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틀 짓도록 이끄는 정치생태학의 혁신이 여기에 있다.
지은이
문규민
경희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동 대학원에서 인도불교철학 연구로 석사 학위를, 서울대학교에서 의식(consciousness)과 형이상학적 양상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분석철학 계통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연구한다. 전문 분야는 의식의 과학과 형이상학이다. 고려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등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Making Sense of Consciousness as Integrated Information”(2019), “Exclusion and Underdetermined Qualia”(2019), “도덕의 방 속 한니발”(2022), “라투르와 일반화된 행위성”(2023)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신유물론 입문: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2022)이 있다. 최근에는 인류학과 존재론의 새로운 흐름들, 체계 이론 등으로 연구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차례
물질의 삶
01 이야기
02 행위성
03 배치
04 생명
05 생기론
06 의인화
07 정치생태학
08 정동
09 인간
10 책임
책속으로
인간이 언제나 이미 비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인식하면 새로운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단지 물질의 행위성과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감탄이나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윤리적·정치적 변화를 자극하고 촉진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 여전히 남의 일,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바로 나 자신이 활기찬 사물이라는 사실, 바로 우리 자신이 언제나 이미 물질이었다는 사실을 불러일으키는 인식에 젖어 든다면, 이런 경험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베넷이 끌어다 쓰는 온갖 지적·문화적 자원들은 바로 그런 경험을 사무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다.
-“물질의 삶” 중에서
베넷은 자신의 글쓰기를 “사변적 존재ᐨ이야기(speculative onto-story)”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소로의 야생성에 대한 감상은 외ᐨ부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쓰레기 더미에 대한 베넷의 경험은 인간이 부여하는 역할과 의미를 튕겨 내는 낯선 힘을 드러낸다. 카프카의 소설 <가장의 근심(The Cares of a Family man)>에 등장하는 오드라덱(Odradek)의 행위는 생명체도 물체도 아닌 비유기적 생명이라는 기묘한 존재를 암시하고, 법정에 제출된 화학 잔여물 추출 검사 장치의 증거력은 재판의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행위소의 역량으로 나타난다.
-“01 이야기” 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형태를 바꾸는 금속 원자들의 능력은 물질이 살아 있다는 말의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결정 구조 내 결함들 덕분에 금속 원자들은 자유롭게 ‘덜그럭거릴’ 수 있다. 이렇게 여차하면 자유롭게 덜그럭거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금속 원자들은 생기를 띤 채 살아 있는 것이다. “금속의 생기, (비인격적인) 생명은 다결정 체계의 각 결정 사이 가장자리에 있는 자유 원자들의 진동 속에 존재한다.” 금속의 삶이란 다양한 결함을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금속의 잠재력이다.
-“04 생명” 중에서
베넷이 위험을 무릅쓰고 의인화에 호소하는 것은 이런 역설이 그녀의 목적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생기적 유물론에서 의인화는 비인간의 행위성, 물질의 생명에 주목하게 하는 주요 수단이다. 의인화를 통해 “처음에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게 될지 모르나, 곧이어 능력 있는 무리와 생동하는 물질성(바라보는 자아를 포함하는)이 드러날 것이다”. 즉, 의인화는 “존재론에 따라 구별되는 존재 범주(주체와 객체)로 가득한 세계가 아닌, 다양하게 구성되어 연합을 형성하는 물질성의 세계를 발견하는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게 한다.
-“06 의인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