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클라이스트의 가장 성공한 코미디 중 하나다. 작품의 소재가 된 건 장자크 르 보의 동판화였다. 그에 앞서 같은 모티프로 제작된 장 바티스트 그뢰즈의 “깨어진 항아리를 든 관능적인 소녀”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클라이스트는 이 에로틱한 소재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렸다고 한다.
희곡은 네덜란드의 작은 시골 마을, 후이줌의 법정에서 항아리를 깨트린 범인을 고소한 사건 중심으로 전개된다. “항아리를 누가 깼는가” 하는 질문에 고소 고발인의 진술, 피고소인과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진다. 항아리를 누가 깼는가 하는 질문은 곧 밤늦은 시각 마을 처녀 이브의 방에 있었던 낯선 남자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깨어진 항아리’는 사건의 증거인 동시에 위험에 처한 또는 이미 금이 간 이브의 명예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오이디푸스, 고전 비극의 영웅이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채 진실에 다가가려 애쓰는 반면 클라이스트의 주인공인 작은 시골 마을의 그저 그런 판사 아담은 처음부터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은폐하고자 애쓴다. 재판을 지연시키고, 수시로 말을 바꾸고 이야기를 꾸며 대면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 준다. 여느 때 같으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아담 판사의 일탈은 고문관 발터의 이례적인 방문으로 새 국면을 맞는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마을 판사 아담의 어수룩함이 빚어내는 희극성 이면에 진지한 주제, 즉 작가가 살았던 시기, 프로이센 법 제도의 과도기적인 상황과 혼란함을 바라보는 작가의 비판적인 시선이 투영되었다. 클라이스트 생전에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영화와 오페라로 각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드라마 중 독일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르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클라이스트 사후인 1877년 작품이 재간행될 때 독일 화가 아돌프 멘첼의 목판화가 실렸다. 19세기 가장 뛰어난 독일 화가 중 한 명으로 거명되는 멘첼의 삽화들에선 이후 등장할 인상주의의 특징이 엿보인다.
200자평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대표 희극. 클라이스트 희곡 8편 중 현대 독일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클라이스트는 “깨어진 항아리를 든 소녀”가 묘사된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은폐된 진실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분석극으로 이 작품을 구성했다. 19세기 독일의 가장 유명한 화가 아돌프 멘첼의 삽화를 실었다.
지은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
1777년 폴란드 국경과 접한 독일의 소도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에서 태어났다. 178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베를린의 위그노파(프랑스의 신교)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유서 깊은 군인 집안에서 클라이스트 또한 군인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1799년에 그는 군인의 길을 포기한다. 클라이스트는 프랑스의 근대화, 나폴레옹군의 독일 지배, 프로이센의 개혁 등 “이런 변화무쌍한 시기”에 국가에 대한 의무, 가문과 신분에 의한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인간으로서의 행복, 인생의 목표를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클라이스트는 파혼까지 겪은 후 ‘위기의 작가’가 된다. 1807년 낭만주의자들과 협업한 예술잡지 ≪푀부스≫, 1810년 시사적인 신문 ≪베를린 석간≫의 편집자와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재정난은 가중되어 갔다. 드라마 작가, 단편 작가, 저널리스트로서의 시도는 모두 실패와 좌절로 이어졌고, 삶의 방향과 목표를 상실한 클라이스트는 1811년 34세라는 나이에 베를린 근교의 반제 호수에서 불치병을 앓던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과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0년 남짓한 창작 기간에 수편의 드라마와 소설을 썼지만 클라이스트 생전에 무대에 오른 작품은 <깨어진 항아리>뿐이었고 단편도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통해 발표되는 정도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클라이이스트의 작품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그가 남긴 8편의 단편과 8편의 드라마는 오늘날 독일어권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옮긴이
진일상
진일상은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등 당시 예술의 주류와는 거리를 두고 자신의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에서 연구와 강의 및 번역을 병행하고 있다. 클라이스트의 단편들을 옮긴 《버려진 아이 외》로 2006년 한·독문학번역상을 수상했다 번역서로 카프카의 《변신》, 테오도어 폰타네의 《마틸데 뫼링》 등이 있다.
차례
서문
나오는 사람들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마지막 장
해설
지은이에 대해
삽화가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마르테 부인 : 천박한 애송이 녀석!
이어 붙여야만 하는 혼인이라면 그건 깨지지 않았어도
깨진 항아리 조각보다 가치가 없어.
마치 어제 벽 선반에 있던 항아리처럼
그걸 광이 나도록 닦아서 내 앞에 둔다고 해도 말이야.
난 이제 항아리 손잡이를 잡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저자 머리에다 대고 박살을 낼 테다,
여기서 이 조각들을 붙이고 싶지는 않아!
그것들을 엮다니!
57-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