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노래로 그린 수묵화
어리고 성긴 매화
너를 믿지 않았더니
눈 기약(期約)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
초 잡고
가까이 사랑할 제 암향부동(暗香浮動)하더라
– 〈매화사〉 8수 중 제2수.
매화가 피어나는 감동을 노래로 그려낸 작품이다. 《금옥총부》에는 안민영이 ‘매화’를 완상하며 지은〈매화사(梅花詞)〉 8수가 실려 있는데, 한 작품의 발문에서는 “(박효관) 선생께서 매화를 아주 좋아하여 손으로 새순을 분재하여 책상 위에 두었다. 바야흐로 그때 몇 송이가 반쯤 피어 은은한 향이 떠다니기에, 그로 인해 〈매화사(梅花詞)〉를 우조 한바탕 8수로 지었다”고 그 창작 동기를 밝혀 놓기도 했다. 이 〈매화사〉 8절은 안민영의 작품 중에서도 고평을 받아온 작품으로 《금옥총부》가 담고 있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고도로 세련된 언어 예술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 준다.
안민영의 목소리, ‘발문’
《금옥총부》에 실린 안민영의 시조 181수에는 예외 없이 그것이 짧든 길든 모두 ‘발문’이 달려 있다. 이는 《금옥총부》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다른 가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발문’의 성격도 매우 다양하여 작품의 특정 시구를 해설하거나 작품의 성격, 주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작품이 창작된 배경을 제시하는 발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삽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장면’들로 가득하다.
신미년(辛未年:1871) 초여름에 운애(雲崖) 선생과 함께 산방(山房)에 마주 앉았는데, 때맞춰 오는 비에 꾀꼬리 우는 소리가 상쾌했다. 술을 따르고 서로 연이어 권할 때 갑자기 옅은 화장의 아름다운 여인 한 사람이 술병 하나를 들고 왔는데, 바로 평양 기녀 산홍(山紅)이었다. (*26번 작품 발문)
내가 평양 감영에 머물 때 모란봉(牧丹峯)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멀리 바라보니, 혜란(蕙蘭)과 소홍(小紅)이 꽃을 밟으며 왔다. (*70번 작품 발문)
내가 남원 출신의 아내와 함께 따른 지 40년으로, 금슬(琴瑟)처럼 벗하여 함께 돌아갈 뜻을 가졌다. 신이 돕지 않아 경진년(庚辰年:1880) 7월 23일에 오랜 병으로 갑자기 떠났으니, 이때의 슬픔과 애도가 과연 어떠했겠는가. (*105번 작품 발문)
내가 강릉 기녀 홍련(紅蓮)과 부부가 되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이 작품을 지어 두 배로 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약속처럼 되지 못했으니 한을 이길 수 있겠는가. (*139번 작품)
내가 주덕기(朱德基)를 이끌고 이천에 머물 때 여염집의 젊은 부인과 몰래 만날 약속을 하고 밤을 새우며 몹시 기다렸다. (*180번 작품 발문)
안민영은 19세기 시조사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금옥총부》의 ‘발문’은 안민영이 살아온 행적에 대한 가장 풍부한 자료로 지목되기도 한다. 안민영은 자신의 작품과 살아온 삶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에 대한 안민영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발문’은 《금옥총부》를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좋아하는 일은 풍류(風流)였으며, 배운 바는 모두 음악이었네
안민영은 당대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의 후원 아래 조선 후기 예능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금옥총부》의 여러 작품과 발문에는 이러한 후원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진연(進宴)을 비롯한 궁중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기녀들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대목이 적지 않아, 기녀가 등장하는 작품만 50편이 넘고, 40명이 넘는 기녀가 등장한다.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이름난 명창, 악공을 비롯해 일류 예인들과의 교유 양상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금옥총부》는 19세기 중후반 안민영과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예능계와 당대 풍류 현장의 한 단면을 비추는 텍스트인 것이다.
* 안민영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그가 스승 박효관과 함께 편찬한 《가곡원류》(박효관·안민영 엮음, 신경숙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를 함께 읽어 보시면 좋습니다.
200자평
《금옥총부》는 주옹 안민영(安玟英)의 가집이다. 그는 19세기 시조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3대 가집 중 하나인 《가곡원류》의 공동 편찬자이기도 하다. 《금옥총부》는 음악에 관한 각종 기록과 서문, 안민영이 창작한 시조 181수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수록된 모든 작품에는 예외 없이 발문이 첨부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가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으로, 안민영이 살아온 행적과 19세기 중후반 조선 예능계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지은이
안민영(安玟英, 1816∼1885?).
안민영은 그의 스승인 박효관(朴孝寬, 1800∼1880?)과 더불어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한 가집 편찬자이자 가창자(歌唱者)로 활동했다. 그들이 편찬한 《가곡원류》는 조선 시대 시조사를 논함에 있어 핵심적인 자료이기에, 그동안의 연구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안민영은 당시 문화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기에, 19세기 시조문학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문화계를 주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음에도, 정작 안민영의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에 관한 자료가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기록은 자신의 작품으로만 엮은 가집 《금옥총부》다.
안민영은 주옹(周翁)과 구포동인(口圃東人)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자(字)는 ‘성무(聖武)’와 ‘형보(荊寶)’다. 특히 ‘구포동인’이라는 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내려 준 것으로, 북악산 기슭의 삼계동에 있는 그의 집 후원에 ‘구(口)’자 모양의 채마밭이 있어 붙여졌다고 밝히고 있다. 《금옥총부》의 기록을 통해서 안민영의 출생 연도가 1816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언제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70세 되던 해인 1885년에 안경지라는 인물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작품이 있어, 적어도 그때까지는 생존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1880년에 세상을 떠난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의 발문(跋文)에 아내와 ‘함께 따른 지 40년으로 금슬처럼 벗하였다(相隨四十年, 琴瑟友之)’라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25세(1840) 무렵에 부인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옥총부》의 기록을 통해서, 안민영은 젊어서부터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교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민영이 66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지은 작품의 발문에, ‘내가 젊어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편안하게 지내며 즐기고 좋아하는 일은 풍류(風流)였으며, 배운 바는 모두 음악이고 가는 곳은 모두 번화한 곳이요 시간이 있으면 또한 세상을 벗어날 생각도 있었다(余自靑春, 豪放自逸, 嗜好風流, 所學皆詞曲, 所處皆繁華, 所交皆富貴, 而有時亦有物外之想)’라고 토로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가집의 수록 작품과 발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과의 인연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인 이재면의 후원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조건에서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낭만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이 가능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흥선대원군과의 만남은 안민영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인데, 1867년부터 ‘오랫동안 모셨다(長侍)’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심복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하정일과의 인연을 강조한 작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흥선대원군과 연결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안민영은 당대 최고 권력자의 후원 아래 당대 문화의 중심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왕실 인물들과도 인연을 맺어 그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작품을 짓기도 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과 별장들을 출입하면서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들의 후원에 대해 《금옥총부》의 작품들과 발문에 상세히 기록을 남긴 것으로 이해된다.
창작 연대가 확인되는 안민영의 마지막 작품은 1885년에 지은 것인데, 이후 창작된 작품의 연대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1880년에 서문을 쓰고도 새롭게 창작한 작품들까지 가집에 추가하여 보완했던 편찬 태도로 보아, 그 이후 어느 시점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짐작된다.
옮긴이
김용찬(金墉鑽)은 전라북도 군산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18세기 가집 편찬과 시조 문학의 전개 양상〉이다. 한중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거쳐, 2008년부터 순천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1년 여름부터 1년간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UBC) 아시아학과의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한국시가문화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주로 고전 시가에 관한 논문과 저서들을 쓰고 있지만,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을 포함한 한국 문학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전 문학 작품을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풀어서 전달할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밖에도 영화와 책에 관한 리뷰(review)들을 다양한 지면에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출간했던 저서로는 《18세기의 시조 문학과 예술사적 위상》(월인, 1999), 《교주 병와가곡집》(월인, 2001), 《조선 후기 시가 문학의 지형도》(보고사, 2002), 《시로 읽는 세상》(이슈투데이, 2002: 개정판, 휴머니스트, 2021), 《교주 고장시조 선주》(보고사, 2005), 《조선 후기 시조 문학의 지평》(월인, 2007),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인물과사상, 2008: 개정판, 한티재, 2019), 《옛 노래의 숲을 거닐다》(리더스가이드, 2013), 《조선 후기 시조사의 지형과 탐색》(태학사, 2016), 《윤선도 시조집》(지만지, 2016), 《가사, 조선의 마음을 담은 노래》(휴머니스트, 2020), 《고정옥과 우리어문학회》(보고사, 2022), 《100인의 책마을》(공저, 리더스가이드, 2010), 《고시조 대전》(공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2), 《고시조 문헌 해제》(공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2) 등이 있다.
차례
가곡원류 능개재만록(歌曲源流 能改齋謾錄)
논곡지음 능개재만록(論曲之音 能改齋謾錄)
논오음지용 유상생협률(論五音之用 有相生協律)
박효관 서(朴孝寬 序)
평조(平調)·우조(羽調)·계면조(界面調)
가지풍도형용 십오조목(歌之風度形容 十五條目)
안민영 자서(安玟英 自序)
우조(羽調)
초삭대엽(初數大葉)
이삭대엽(二數大葉)
중거삭대엽(中擧 數大葉)
평거삭대엽(平擧 數大葉)
두거삭대엽(頭擧 數大葉)
삼삭대엽(三數大葉)
소용(搔聳)
회계삭대엽(回界 數大葉)
계면조(界面調)
초삭대엽(初數大葉)
이삭대엽(二數大葉)
중거 삭대엽(中擧 數大葉)
평거 삭대엽(平擧 數大葉)
두거 삭대엽(頭擧 數大葉)
삼삭대엽(三數大葉)
언롱(言弄)
농(弄)
계락(界樂)
우락(羽樂)
언락(言樂)
편락(編樂)
편삭대엽(編數大葉)
언편(言編)
편시조(編時調)
작품 찾아보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끝.
책속으로
어리고 성긴 매화
너를 믿지 않았더니
눈 기약(期約)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
초 잡고
가까이 사랑할 제 암향부동(暗香浮動)하더라.
〈금옥 * 15, #3153.1〉
낙화(落花) 방초로(芳草路)에
비단 치마 끌었으니
바람에 날리는 꽃 옥협(玉頰)에 부딪힌다
아깝다
쓸어 올지라도 밟든 마라 하노라.
내가 평양 감영에 머물 때 모란봉(牧丹峯)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멀리 바라보니, 혜란(蕙蘭)과 소홍(小紅)이 꽃을 밟으며 왔다.
〈금옥 *70, #0790.1〉
내가 젊어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편안하게 지내며 즐기고 좋아하는 일은 풍류(風流)였으며, 배운 바는 모두 음악이고 가는 곳은 모두 번화한 곳이요 시간이 있으면 또한 세상을 벗어날 생각도 있었다. 매번 아름다운 산수를 만나면 문득 기쁘고 즐거워 돌아가기를 잊었으며, 그런 까닭에 금강산, 설악산, 대동강[貝江], 묘향산, 동해와 서해 무릇 나라 안의 명승지는 거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어찌 모두 풍류와 번화한 곳이 아니었겠는가.
〈금옥 *166, #2173.1〉 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