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7세기는 중국 소설사의 황금기다. 다양한 형태로 확대 · 팽창해 가던 출판 시장을 배경으로 다양한 제재와 편폭을 지닌 소설 작품들이 대거 출현했기 때문이다. ≪금고기관≫은 편집자 포옹노인(抱甕老人)이 그 시기를 대표했던 단편소설집 ‘삼언(三言)’과 ‘양박(兩拍)’에서 독자들의 취향과 작품성, 주제 의식을 두루 고려해 뽑은 일종의 선집본이다. ‘삼언(三言)’이란 세 작품집 ≪유세명언≫, ≪경세통언≫, ≪성세항언≫을 가리킨다. ‘세상을 깨우치다[喩世]’, ‘세상을 경계하다[警世]’, ‘세상을 각성시키다[醒世]’라는 제목에 ‘소설’이란 풍속의 교화에 힘쓰는 것이라는 작자 풍몽룡의 입장이 나타난다. 한편 ‘양박(兩拍)’이란 ≪박안경기≫와 ≪이각박안경기≫를 가리킨다. ‘책상을 치며 기이함에 놀란다[拍案驚奇]’는 제목에는 작품의 오락성만이 부각되어 있으나, 작자 능몽초가 쓴 서문을 살펴보면 “듣는 사람들이 경계로 삼을 만하다”며 소설의 권선징악적인 가치를 내세운다. 두 책에 공통하는 ‘인정 과 풍속의 교화’라는 소설에 대한 효용론적 입장은 동아시아권에서 근대적 의미의 ‘소설’ 장르의 형성에 본바탕이 됐다. ≪금고기관≫은 원본인 ‘삼언’과 ‘양박’을 압도할 만큼 큰 인기를 얻어 이후 3백여 년간 광범위하게 읽혔으며 번역 · 번안으로서 근대 초기 한국에까지 유통되며 우리 문학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의 ≪금고기관≫은 지금까지 완역되지 않았던 작품을 우선으로 4편을 뽑아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그림 속에 숨겨진 소송 사건의 비밀>은 오늘날도 종종 매체를 통해 이슈가 되곤 하는 재산분쟁에 관한 소송 사건을 다룬다. 중국에서 재판 사건을 다루는 소설은 공안(公案) 소설이라 별도로 구분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소설은 근대 초기 한국에서 신소설 <행락도(行樂圖)>로 번안됐다. 두 번째 이야기 <왜 당대 최고의 기녀는 기름장수를 선택했을까?>는 ‘사랑’을 주제로 하는 작품으로 당대 최고의 기녀가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명예를 마다하고 진실한 사랑을 위해 신분이 낮은 기름장수를 배우자로 선택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세 번째 이야기인 <늙은 문하생과 젊은 스승의 기막힌 인연> 과거 시험을 모티프로 한다. 전통 시기 중국 지식인들에게 과거 시험은 거의 유일한 신분 상승의 출구였는데, 명청 시기 과거 시험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양산된 이른바 ‘잉여 지식인’들은 많은 사회적 병폐를 낳기도 했다. 5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과거 시험에 합격한 선우동(鮮于同)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네 번째 이야기인 <한 번의 웃음이 맺어 준 인연>의 주인공은 실존 인물 당인(唐寅, 1470~1523)이다. 그는 과거를 포기한 후 그림과 글을 팔며 도시에서 은거하는 이른바 ‘시은(市隱)’으로서의 삶을 산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시은’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금고기관≫은 명대 백화단편소설집 ‘삼언(三言)’과 ‘양박(兩拍)’에서 가려 뽑은 일종의 선집본이다. 원본인 ‘삼언’과 ‘양박’을 압도할 만큼 큰 인기를 얻어 이후 300여 년간 광범위하게 유통됐다. 이 책은 ≪금고기관≫에 수록된 40편의 소설 중 4편을 뽑아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재판, 사랑, 과거(科擧), 시은(市隱)이라는 4개의 키워드를 통해 17세기 중국을 조망한다. 나아가 번역 · 번안의 형태로 근대 초기 한국문학사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금고기관≫은 근대적 의미의 ‘소설’이 성립하기 이전, 소설 예술 형식의 본바탕을 보여준다.
지은이
≪금고기관≫의 편집자가 누구이고 어떤 일생을 살다 간 사람인가에 대해서 사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이 책이 출현했던 17세기 출판업계에서는 필명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 있었다. 이는 소설과 같은 통속적인 출판물에 자신의 실명을 명기하는 것을 꺼렸던 당시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금고기관≫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꼽자면 대략 네 명 정도를 들 수 있다. 풍몽룡과 능몽초, 포옹노인(抱甕老人)과 소화주인(笑花主人)이 그들이다. ≪금고기관≫이 풍몽룡의 ‘삼언’과 능몽초의 ‘양박’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서 40편을 뽑아 수록하고 있는 선집본(選集本)이라는 점에서 우선 풍몽룡과 능몽초의 연관성을 언급할 수 있다. ≪금고기관≫의 책 표지에는 ‘묵감재수정(墨憨齋手定)’이란 글자가 있는데,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묵감재는 풍몽룡의 호다. 이 작품의 출간과 관련하여 풍몽룡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프랑스 파리 국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을 비롯해 이 책의 조기 판본들은 공통적으로 표지에 이 작품의 편집자가 ‘포옹노인(抱甕老人)’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책을 출간하면서 쓴 서문 마지막 부분에는 ‘고소(姑蘇) 소화주인(笑花主人)’이라는 필명이 보인다. 서문을 쓴 소화주인은 원래 “나는 그중에서 특별히 백 편을 선별해 다시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포옹노인이 먼저 내 마음을 알고 40편을 뽑아 ≪금고기관≫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편집자인 포옹노인과 서문을 쓴 소화주인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별개의 인물이고, ‘삼언’과 ‘양박’에 대해서 평범한 일반 독자 이상의 이해와 애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화주인은 서문에서 능몽초보다는 풍몽룡에 대해 더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묵감재가 증보한 ≪평요전(平妖傳)≫은… 그 재주가 ≪수호전≫, ≪삼국연의≫ 사이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그가 편찬한 ‘삼언’은 다양한 인정세태,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등을 잘 묘사하고 있어 신기한 내용에 탄복하고 깊은 감동을 주며 해피엔딩으로 끝나 풍속을 교화한다.” 이에 반해 능몽초의 ‘양박’에 대해서는 “많은 작품을 수집하고 있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라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두 사람에 대한 이런 엇갈린 평가는 ≪금고기관≫이 ‘삼언’에서 29편, ‘양박’에서 11편을 선별하여 ‘삼언’ 작품이 전체의 70퍼센트 이상인 것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의 편집자인 포옹노인과 관련하여 풍보선은 1988년 ≪문학유산(文學遺産)≫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가 강소성 소주(蘇州) 오강(吳江) 출신의 고유효(顧有孝, 1619~1689)라는 설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고유효는 자가 무륜(茂倫), 호가 포옹노인으로 명 왕조가 멸망한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재야에서 활동했다. ≪당시영화(唐詩英華)≫, ≪기사시초(紀事詩鈔)≫, ≪오조명가시선(五朝名家詩選)≫ 등을 출간한 선집가로도 명성이 있었다. 풍보선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고유효가 소주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네 사람이 공통적으로 겹쳐지는 시기와 장소가 바로 ‘17세기 소주’이기 때문이다. 당시 소주는 남직예(南直隸)에 속해 있었고 순무(巡撫) 아문이 있던 강남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삼언’과 ‘양박’이 출판되었던 소주에서 다시 그 선집인 ≪금고기관≫이 출현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고소(姑蘇) 소화주인(笑花主人)’에서 ‘고소(姑蘇)’는 바로 소주의 옛 명칭이다.
지금까지 ≪금고기관≫과 관련이 있는 네 사람에 대해서 몇 가지 것들을 추측해 보았다. 어떤 이는 편집자인 포옹노인보다 원작자인 능몽초나 풍몽룡이 이 작품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금고기관≫은 당시 거의 유일한 선집본 소설로, 이후 원작을 대체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따라서 당시 독자들의 관심과 취향을 읽어 내고 작품의 구조, 주제 의식 등을 두루 고려해서 선별한 편집자 포옹노인의 안목과 감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옮긴이
서울대학교에서 중국 고전소설을 전공했고,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명청 시기 중국소설, 동서 문화 교류사, 청대의 사회와 문화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개인의식의 성장과 중국소설≫, ≪중화명승≫(공저), 역서로 ≪지역문화와 국가의식≫, ≪무성희≫, ≪서유기≫(공역) 등이 있다.
차례
그림 속에 숨겨진 소송 사건의 비밀
왜 당대 최고의 기녀는 기름 장수를 선택했을까?
늙은 문하생과 젊은 스승의 기막힌 인연
한 번의 웃음이 맺어 준 인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경전들이 상자와 책상에 가득하고 수많은 말들이 쓰여 있지만 모두 다 쓸데없는 것이다. 내 생각에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단지 두 글자로 된 경전이 필요할 따름인데, 바로 ‘효제(孝悌)’라고 하는 두 글자다. 이 두 글자로 된 경전 중에서 다시 한 글자만을 알아야 한다면 그것은 ‘효’라는 글자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라면 부모가 사랑하는 사람을 또한 사랑하고, 부모가 공경하는 사람을 또한 공경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형제는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혈통과 뿌리가 같은 사이니 어찌 화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안의 재산은 모두 부모가 번 것인데 뭐 네 것 내 것 나누고 토지가 기름지고 메마른지를 따진단 말인가?
-<그림 속에 숨겨진 소송 사건의 비밀> 중에서
“내가 비록 재능과 미모가 있다 하지만 기녀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멸시와 천대를 받는구나. 평소 수많은 신분이 높고 고귀한 사람들을 알고 지냈던 것은 다 쓸데없는 일이었어. 이런 치욕을 당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결국 아무 쓸모도 없는 걸. 돌아간다 한들 어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고상하게 죽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명분도 없이 죽는다면 그동안 쓸데없이 헛된 명성을 누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지경에 처해 보니 시골 마을의 아낙도 나보다는 열 배는 낫겠구나.”
-<왜 당대 최고의 기녀는 기름 장수를 선택했을까?> 중에서
“대체로 과거를 통한 출세의 빠르고 늦음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일찍 명성을 이루는 자도 있고 늦게 출세하는 사람도 있다. 일찍 명성을 이룬 자만이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늦게 출세한 자는 성공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이가 젊다고 자신을 믿어서도 안 되고, 나이가 늙었다고 스스로 포기해서도 안 된다. 늙거나 젊다는 것을 나이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 세상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귀천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니, 이후의 날들이 길고 짧은 것을 어찌 알겠는가? 젊고 부귀한 사람을 보면 아부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몇 살 더 나이를 먹고 벼슬길에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을 보면 그를 무시한다. 이런 사람은 식견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농사에 비유하자면 빨리 익는 곡식도 있고 늦게 익는 벼도 있는 것이니, 어느 것이 수확이 좋을지는 모를 일이다.”
-<늙은 문하생과 젊은 스승의 기막힌 인연> 중에서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입으로 중얼거리며 내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네. 속으로 남을 해칠 계획을 세웠던 적은 없는가? 입으로 양심을 속이는 말을 했던 적은 없는가? 사람이라면 생각과 말이 일치해야 하거늘, 효제충신(孝悌忠信)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네. 그 나머지 사소한 덕행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어떻게 내 행동거지를 완벽하게 수련할 수 있겠는가? 머리에는 꽃을 꽂고 손에는 술잔을 들고, 가동(歌童)의 노래를 듣고 무희(舞姬)의 춤을 구경하네.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옛사람도 얘기하던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이를 부끄럽게만 여기는구나. 마음속으로, 입으로, 얼마나 다른 사람을 속이고 천리를 거스르며 살고 있는가?”
-<한 번의 웃음이 맺어 준 인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