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타이완에는 중국인과 혈통도 문화도 전혀 다른 토착 원주민이 있다. 또 오래전에 중국 대륙에서 건너와 뿌리는 한족이지만 중국인도 아니고 토착 원주민도 아닌 민난인(閩南人)이 있다. 여기에 또 1949년 국민당이 후퇴할 때 대량으로 이주한 외성인(外省人)이 있다. 타이완은 혈통, 언어,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사는 복잡한 공간이다. 타이완 향토문학의 기초를 다진 중리허와 그의 작품에는 타이완인이 갖는 복잡한 정체성이 교착하고 있다.
<원향인>, 근대인에게 ‘고향’과 ‘상실’은 같은 낱말이다.
‘원향’이라는 말에는 다층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중국 대륙에 대한 혈연적, 문화적 유대감이 그 하나이면, 다른 한편에는 직접 체험해 본 ‘원향’ 중국이 자신들이 그리던 곳과는 다르다는 실망감이 자리한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원향’이라는 말을 접하며 중국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고향이라 믿었다. 그러나 작품 도처에는 주인공의 ‘상상된 향수’와 원향을 향한 막연한 동경이 실패할 것임을 예고하는 복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민의 역사가 뚜렷한 타이완 사회에서 ‘족군(族群)’을 둘러싼 정체성 문제가 쟁점이 됐을 때 이목을 끌었던 이 작품은 중국과 다른 타이완의 역사와 정체성 수립 문제를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협죽도> 후원에는 독초가 자란다.
사합원(四合院)은 베이징과 중국의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주거 형태다. 중리허는 사합원을 배경으로 빈곤과 삶의 무게에 눌려 ‘인간다움’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군상을 치밀하게 묘사했다. 체면을 따지지 않는 인물, 게으른 인물, 나약한 인물, 저항할 줄 모르는 인물, 가족을 져버린 인물. <협죽도>가 표상하는 중국인의 형상은 상당히 부정적이어서 많은 비평가들은 그것을 중리허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러한 경사를 타이완인의 원향에 대한 상실감과 연관 지을 때 작품의 의미는 한층 더 풍성해진다.
<도망> 봉건적 유습에 대한 저항
이 작품은 하카(客家) 사회에 남아 있던 동성불혼(同姓不婚)이라는 봉건적 유습 때문에 사랑의 도피를 감행해야 했던 중리허의 개인적 체험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자전적인 작품이다. 중리허는 중핑메이(鍾平妹)와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 타이완을 떠났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는 자세한 내막은 생략된 채, 주인공 두 사람은 타이완을 출발해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조선의 부산을 거쳐 기차를 타고 만주를 향한다. 종착지에 닿지 못한 채 끝을 맺는 처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을 손에서 놓는 순간까지 긴박감과 초조를 느끼게 한다.
200자평
타이완의 대표적인 향토문학 작가 중리허(鍾理和)의 작품집이다. 우리나라와 동일하게 일본 식민지 경영의 희생물이됐던 타이완. 그러나 그 결은 우리의 그것과 상당히 달랐다. 이 책이 수록하고 있는 <원향인>, <협죽도>, <도망> 세 작품에는 타이완 피식민지인이 갖는 복잡한 민족적 · 사회적 무의식이 직간접적으로 투영돼 있다.
지은이
1915년 11월 6일 타이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사숙에서 배운 한문을 바탕으로, 중국 고전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5·4신문학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년 시절부터 백화(白話)로 글쓰기를 하기 시작했다.
1938년 같은 성씨를 가진 연상의 농장 여공과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타이완 하카 사회에서는 동성(同姓)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풍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분위기와 집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 대륙 둥베이(東北)의 선양(瀋陽)으로 도망갔다가 2년 뒤인 1940년에 타이완으로 잠깐 돌아와 중핑메이와 결혼한 뒤 선양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어려웠던 결혼 과정과 아내와의 추억은 <동성 결혼(同姓之婚)>, <도망>, <가난한 부부>(≪목어 소리−현대타이완소설선 2≫, 한걸음더, 2009 수록), <문(門)>과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다.
1941년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는데, 석탄 소매업을 하면서 독서와 습작을 이어 나갔다. 1945년 그의 첫 번째 문집이자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소설집인 ≪협죽도≫가 베이징 마더쩡서점에서 출판되었다. 이 문집에는 중편소설 <협죽도> 외에도, 단편소설 <아지랑이(游絲)>, <새로운 탄생(新生)>, <억새풀(薄芒)>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뒤 타이완으로 영구 귀국했다. 1947년 폐병으로 3년 동안 치료를 받았는데, 결핵균이 위와 장에까지 침투해 죽을 고비를 넘겼고, 갈비뼈를 잘라 내는 큰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이후 주로 휴양을 하며 지냈는데, 이 와중에도 창작에 힘써 그의 대다수 작품이 이 10년 동안 창작되었다. 다년간의 병치레로 인해 가산을 모두 팔아야 했으며, 최종적으로 땅 몇 마지기밖에 남지 않아, 생활이 극도로 빈곤해졌다. 게다가 척추결핵에 걸린 큰아들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쳐 곱사등이가 되었고, 건강했던 둘째 아들은 아홉 살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요절했다. 평생 시달렸던 병마와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고통스러운 경험은 <부활(復活)>, <삶과 죽음(生與死)>과 같은 작품 속에 반영되어, 중리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타이완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해서, 장기간 발표와 출판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 ≪리산농장≫이 1956년 ‘중화문예상금위원회(中華文藝獎金委員會)’ 장편소설 부문에서 1등이 없는 2등 상을 받음으로써 사회에 알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상금위원회와 그 기관지 <문예창작(文藝創作)>이 잇달아 문을 닫고 정간되면서, 중리허의 작품은 원활하게 발표될 수 없었다. 1960년 8월 4일, 병상에서 중편소설 <비(雨)>를 수정하는 데 무리하다 지병이 도져 각혈을 하고 죽었다. 당시 나이 45세였다.
옮긴이
부산대학교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석사 과정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중국 현대 작가 저우쭤런(周作人)에 대한 논문 <周作人 散文에 나타난 문학 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동안 20세기 초반 동·서양 지식 교류의 역사 및 세계사적 지식 담론의 보급과 유통에 관심을 가지고 <저널리스트 林語堂 初探: 저널식 글쓰기와 간행물 발행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작인(周作人)의 루키아노스(Lukianos) 대화집 번역의 의의>를 연구했으며, 지만지와의 인연으로 최근에는 타이완 작가와 말레이시아 출신 화문작가를 탐구하고 있다. 역서로는 타이완 작가 중리허(鍾理和)의 ≪원향인(原鄕人)≫(2011)과 왕전허(王禎和)의 ≪혼수로 받은 수레(嫁粧一牛車)≫(2012), 천팡밍(陳芳明)의 <타이완 신(新)문학사>(학고방, 2019)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이름-자리와 거리두기: 黃錦樹의 南洋人民共和國備忘錄을 중심으로>, <우허(舞鶴) 미학의 가능성과 한계: <餘生>을 중심으로>, <샤오헤이(小黑)의 <여정의 종결> 연구: 작은 문학(small literature)의 의의를 중심으로>, <어느 원주민 여성의 자기성(selfhood)의 탐색: 리그라브 아우(Liglav A-Wu)의 산문을 중심으로>가 있다.
차례
원향인
협죽도
도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타이완에 정착한다. 손자의 손자는 중국을 찾아간다. 고향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전쟁과 재해, 수탈과 가난은 기억, 곧 고향을 지워 버린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와서 나는 곧장 할머니께 이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다 듣고 나서 웃으면서, 우리들도 원래는 원향 사람이며, 우리들은 원향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럼, 우리 아빠도 이사 온 거예요?”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니란다!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란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왜 이사 온 거예요?”
“이 할미도 잘 모르겠구나.” 할머니는 한탄하시며, “아마 그곳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없어서였겠지”라고 대답하셨다.
“할머니.” 나는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원향은 어디에 있어요? 아주 멀어요?”
“서쪽에 있지. 아주아주 멀단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여기로 올 때 배를 타야 한단다.”
원향, 바다, 배! 이것은 정말이지 일종의 거대한 학문이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문이 막혀서 또 멍하니 있었다. 할머니는 예전에 나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었다.
-<원향인(原鄕人)> 중에서
2.
사합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와 같았다. 그들은 척박한 자갈과 그늘진 잡초 속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햇빛의 따스함을 받을 수 없었고, 비와 이슬의 자양분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쯤 죽은 듯한 생명을 붙들어 두기 위해, 최후의 승부를 걸 만한 그리고 모든 것을 걸 만한 운명과 기회를 늘 기다리고 있었다.
-<협죽도(夾竹桃)> 중에서
3.
그녀는 굳세게 버티고 있었지만, 쇠약한 몸 때문에 자주 고개를 늘어뜨렸다. 나는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 말 없는 격려가 내 손에서 그녀의 마음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들고는, 이로 더 깊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심하세요.” 그녀가 가냘프게 말했다. “나는 잘 갈 수 있을 거예요.”
줄을 선 곳에서 배에 오르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 이 몇 시간이 우리에게 준 고통과 초조함은 비할 바가 없었다. 우리가 선창에 들어섰을 때, 나 자신은 벌써 수세기를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도망(奔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