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로두의 1935년 작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가 우리말로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다.
2017년 북미 갈등으로 한반도 내 전쟁 위기 의식이 고조되자 프랑스의 한 인터넷 언론 매체는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일어나리](LA GUERRE DE COREE (N’)AURA (PAS) LIEU)’라는 기사를 냈다. 지로두의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를 패러디한 제목이었다. 기사 내용은 “대체로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지만 지로두의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작품이 암시하는바, 전쟁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경고였다. 이후 남북 정상 판문점 회담, 북미 정상 싱가포르 회담이 이어지며 전쟁이라는 위기감이 빠르게 평화라는 희망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2023년 현재 다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1차 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장 지로두는 다시금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쟁 재발을 크게 우려하며 이 작품을 썼다. 그리스 비극의 단골 소재인 트로이 전쟁이 배경이 되었다. 헥토르가 막 승전하고 돌아온 트로이에는 새로운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숱한 참전 경험으로 전쟁의 무가치함과 비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사 헥토르는 전쟁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듯 “트로이 전쟁은 일어난”다. 무엇이 헥토르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 전쟁의 문을 열었을까, 지로두의 엄중한 경고가 여기에 있다.
헥토르는 전쟁을 막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적군 참모 율리시스와의 마지막 회담에 나선다(2막 13장). 이와 유사한 상황이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히틀러와 유럽 정상의 만남으로 재현되었다. 이 만남은 결국 전쟁을 막지는 못했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지로두가 작품에서 경고한 바가 곧바로 현실화하면서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는 크게 화제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활발히 공연되는 점은 세계 각지에서 계속되는 전쟁들과 연계해 그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200자평
장 지로두의 희곡 중 가장 유명한 작품.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현대적 다시쓰기를 시도했다.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고집 때문에 전쟁이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작품 발표 직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지로두의 선견지명이 주목받았다.
지은이
장 지로두(Jean Giraudoux, 1882∼1944)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다.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소설 《시골 여자들》(1909)로 데뷔해 《쉬잔과 태평양(Suzanne et le Pacifique)》(1921), 《지그프리드와 리모주 사람(Siegfried et le Limousin)》(1922), 《벨라(Bella)》(1926)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1928년 소설 《지그프리드와 리모주 사람》을 극화한 〈지그프리드〉로 극작 생활을 시작한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유명한 배우이자 연출가인 루이 주베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이후 작가와 연출가로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앙피트리옹(Amphitryon)〉(1929), 〈유디트(Judith)〉(1931), 〈간주곡(Intermezzo)〉(1933),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La Guerre de Troie n’aura pas lieu)〉(1935), 〈옹딘(Ondine)〉(1939),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1943), 〈샤이오의 광녀(La Folle de Chaillot)〉(1945)를 무대에 올렸다. 또한 지로두는 〈랑주 공작부인(La Duchesse de Langeais)〉(1942), 〈죄를 지은 천사들(Les Anges du péché)〉(1944)이라는 영화 시나리오도 썼다.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다양한 작품을 썼지만, 지로두는 희곡 작가로서 가장 주목을 받았으며 가장 성공했다. 그의 작품들은 기발한 발상과 자유로운 상상력, 시적인 문체를 특징으로 하는 아름답고 문학적인 연극으로 평가받는다.
옮긴이
임선옥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프랑스 파리−소르본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겸임교수, 서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 강사,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희곡 문학 및 연극 이론을 강의하며 연극평론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21세기 연극서곡》, 《연극, 삶의 기호학》, 《동시대 연극비평의 방법론과 실제》(공저), 《예술을 쓰고 감동을 읽다》(공저), 역서로는 프랑스 소설 《시인을 꿈꾸는 나무》, 《욥의 아내》, 《슬픈 천사여 안녕》, 프랑스 희곡 《어머니》, 《아들》,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 논문으로는 〈몰리에르 희극의 변장미학〉, 〈몰리에르와 동시대 희극의 대단원 연구〉, 〈장 지로두의 비극에 나타난 운명〉, 〈장 주네의 〈하녀들〉에 나타난 고전 극작법의 변주〉, 〈장 주네의 〈하녀들〉 구조의 발생론적 접근〉, 〈기호학과 연극비평〉, 〈열린 기호학을 활용한 연극비평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헥토르 : 아바마마, 몇 달 전부터 싸워 온 사람들을 위해 평화가 뭘 의미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그건 결국 물에 빠지거나 매몰되는 사람들에겐 바닥을 찍는 겁니다. 최소한의 평화에 발을 딛고, 잠시 발가락만이라도 평화에 닿게 해 주세요!
프리아모스 : 헥토르, 오늘 ‘평화’란 말을 도시에 던지는 것은 독을 던지는 것이란 걸 생각해라. 너는 무장을 풀게 할 것이다. ‘평화’라는 말로 추억과 희망을 주게 될 거야. 병사들은 평화의 빵을 사고, 평화의 포도주를 마시고, 평화의 여인을 안으려고 서두르겠지.
헥토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