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수도(水道)를 중심으로 기술된 종합성 지리서의 역작
《수경주》는 중국 고대 북위(北魏) 시기의 학자 역도원(酈道元)이 저술한 전국 규모의 하천지(河川志)다. 《수경》이란 저술에 상세한 주석을 보충·보완해 완성한 것으로, 중국의 강하(江河)와 수도(水道)를 전문으로 기록했다. 원래 《수경》은 3권으로 전체 분량은 겨우 8200여 자에 불과했다. 북위 후기에 이르러 역도원이 《수경》이란 저술에 주목을 했고, 《수경주》는 원래 《수경》이란 원문에 비해 30배가 넘는 규모의 주석을 통해 독립된 새로운 고전 명작으로 재탄생했다. 그리하여 본서는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수도(水道)를 중심으로 기술된 종합성 지리서의 역작이 되었으며, 또한 연혁지리·자연지리·경제지리 방면에서 높은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수경주》에 수록된 대소의 하류는 모두 1252개로 증가해 《수경》에 비해 열 배 정도 많았다. 이 외에도 100여 곳의 호박(湖泊)과 소택(沼澤), 200여 곳의 천수(泉水)와 정수(井水) 등의 지하수도 하류와 함께 수록했다. 그뿐만 아니라 상세한 관찰을 통해서 특정한 지역에 분포한 하곡(河谷)의 크기와 하상(河床)의 깊이, 그리고 그 수량과 수위(水位)의 계절적인 변화, 모래의 수량, 하류가 어는 시기 등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수록했다.
산수 저술의 으뜸
《수경주》는 학술계 각 분야에서 가치를 주목받지만 문장의 우수함으로 그 명성이 더욱 알려졌다. 명나라 후기의 사학가인 장대(張岱)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수경주》를 극찬했다.
“고인의 산수 저술 중에 가장 으뜸이 역도원이고 다음이 유자후(柳子厚)이며, 최근 저술로는 원중랑(袁中郞)이 있다.”
유자후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유종원을, 원중랑은 명나라 시기의 저명한 문학가인 원굉도(袁宏道)를 말한다.
정약용의 《대동수경》
《수경주》의 영향은 한반도까지 이르러 정약용은 이 책을 참고해《대동수경》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등 북부 조선의 6대하류가 발원해서 바다로 들어가기까지의 강의 원류와 지류, 수도(首都)의 분합(分合)에 따른 명칭의 변화와 함께 해당 지역의 연혁과 일체의 관련 사항을 종합적으로 기술했다. 정약용이 《대동수경》의 저술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수경》과 《수경주》를 참고했다는 사실은 여러 본문에서 발견된다.
이 책은 전문적인 지리 지식과 무관한 일반 독자를 겨냥해서 가독성이 높은 내용을 중심으로 흥미롭고, 저명하고, 또한 생동감 넘치는 편장(篇章)을 선택했다. 그리고 분량을 고려해 대표적인 하류를 선별했고, 기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하류는 별도로 선택했다. 아울러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내용을 수록했고, 그중에 장문의 내용은 나누어서 핵심을 선별했다.
200자평
6세기 이전 저술된 중국의 종합 지리서다. 황하강(黃河) 수계(水系)에서 시작하여 회하(淮河), 장강(長江) 수계, 나아가 남방의 여러 수계에 이르는 중국 각지의 수로를 따라 그 주변 지역의 지리적 상황, 명승고적, 역사적 사건, 민간전설, 풍물 등의 다양한 내용을 기록했다. 문장이 생동감 넘치고 풍부한 정취를 담고 있어 문학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17세기 조선에 이르러 정약용의 ≪대동수경(大同水經)≫을 탄생시키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원문과 함께 1423개에 달하는 주석을 달아 학술적 가치를 더했다.
지은이
역도원의 자(字)는 선장(善長)이고 범양군(范陽郡)의 탁군( 郡), 즉 현재 하북의 탁주( 州) 출신이다. 그의 부친인 역범(酈范)은 일찍이 청주자사(靑州刺史)를 지내기도 했다. 역도원의 출생 시기는 현재까지 미상이다. 연구자에 의하면 대략 북위 헌문제(獻文帝) 천안(天安) 원년(466년)이나 이보다 약간 이후인 효문제 연흥(延興) 2년(472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일찍이 북위의 수도에 있었던 평성(平城)에서 상서주부랑(尙書主簿郞)과 상서사부랑(尙書祠部郞)을 역임했다가 이후에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를 지내기도 했다. 이후에 경사를 떠나서 지방관에 재임하면서 기주진동부(冀州鎭東部)의 장사(長史)와 노양군태수(魯陽郡太守) 및 동형주자사(東荊州刺史)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사회적 혼란은 역도원으로 하여금 분주하게 전국을 주유하듯이 지방관을 역임하게 했고, 이것이 결국 《수경주》라는 거작을 저술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역도원은 한때 관직을 그만두고 10여 년간 귀향을 했다가 후에 다시 하남윤(河南尹)과 어사중승(御使中丞) 등을 역임했다. 마지막으로 북위 효명제(孝明帝) 효창(孝昌) 3년(527년)에 관우대사(關右大使)의 직분으로 소보인(蕭寶夤)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음반역(陰盤驛), 즉 현재 섬서 임동(臨潼) 부근에서 피살되었다.
옮긴이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다. <북조(北朝) 시기 잡호(雜戶)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북위(北魏) 탁발(拓跋) 통치 집단의 형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이징수도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를 거쳐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와 경희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등에 출강했다. 현재는 중국 산동성 제남대학교(濟南大學校)의 산하 ‘환황해지역연구센터’의 초빙연구원으로 재직 중에 있다. 중국 고대사 가운데 특히 진한(秦漢)과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의 통치 집단의 형성과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고 북방 민족의 정권 수립과 지역화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선진(先秦) 시기의 제자백가의 사상과 목록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역사 문헌학적인 지식을 근간으로 역사 문헌의 체계적인 분류와 문헌 사료의 효율적인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학 개론》, 《신자》, 《제갈량 문집》, 《한국화교사》, 《중국가보학 통론》(공역) 등이 있으며, <16국 시기 호군제(護軍制) 연구−호한 분치(胡漢分治)를 중심으로>, <盛樂及代北地區與拓拔鮮卑的建國>, <중국 소수민족 정책과 민족 간부 양성>, <‘신중화주의’ 속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사부(史部)의 분류 체계에 관한 기원 연구>, <중국 역사지리 문헌의 문헌학적 분류와 그 기원의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하수(河水)
속수(涑水)
분수(汾水)
문수(文水)
제수(濟水)
청수(淸水)
심수(沁水)
기수(淇水)
탕수(湯水)
원수(洹水)
탁장수(濁漳水)
이수(易水)
구수(滱水)
성수(聖水)
누수(㶟水)
누여수(㶟余水)
포구수(鮑丘水)
대요수(大遼水)
낙수(洛水)
이수(伊水)
곡수(穀水)
위수(渭水)
양수(漾水)
단수(丹水)
여수(汝水)
영수(潁水)
유수(洧水)
거수(渠水)
수수(睢水)
문수(汶水)
술수(沭水)
거양수(巨洋水)
치수(淄水)
면수(沔水)
회수(淮水)
운수(溳水)
비수(肥水)
강수(江水)
엽유하(葉楡河)
이수(夷水)
자수(資水)
상수(湘水)
진수(溱水)
뇌수(耒水)
절강수(浙江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기수는 다시 동쪽으로 흘러 우측에서부터 천원수(泉源水)와 만난다. 천원수는 두 곳에서 발원을 하는데, 그중 하나는 조가성(朝歌城)의 서북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간다. 이곳의 어떤 노인이 새벽에 강을 건너고자 했지만 강물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주왕(紂王)이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를 묻자 좌우의 신하들이 아뢰길 “노인의 골수(骨髓)가 충실하지 않기 때문으로 한랭(寒冷)한 기온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주왕은 그 노인을 잡아서 다리를 잘라 그의 골수를 확인했다.
-114~115쪽
낙수는 동쪽으로 흘러 황정(黃亭)의 남쪽을 지나다가, 물줄기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황정계수(黃亭溪水)와 합류한다. 황정계수는 제호산(鵜鶘山)에서 발원을 한다. 제호산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높고 가파르기가 마치 산 정상이 하늘과 닿아 있는 듯하고, 산벼랑은 직접 구름과 닿아 있다. 이곳에는 거대한 바위에 딛고 올라갈 수 있는 계단도 없었다. 그래서 원숭이도 민첩성을 잃고, 날다람쥐가 가볍게 움직이는 재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6쪽
물줄기의 기슭을 따라서 염정(鹽井)이 100여 개 있고, 소금을 생산해 파(巴)와 천(川) 지역 일대에 공급한다. 소금의 알갱이가 큰 것은 1촌(寸)의 방형(方形)이고, 중간이 (소금 기둥으로) 솟아 있어 그 모양이 마치 펼쳐 놓은 우산 같았다. 그래서 이름을 산자염(傘子鹽)으로 불렀던 것이고, 어떤 것은 우산 같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방형의 모양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다른 소금과는 구별이 되었다. 왕은(王隱)은 《진서(晋書)·지도기(地道記)》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탕구(湯口)에 유입된 지점에서 43리 되는 지점에 돌들이 있는데, 이를 물에 삶으면 소금이 되었다. 큰 돌덩이는 1승(升) 정도이고, 작은 것은 주먹만 한 것으로 이를 삶아서 증발시키면 소금이 되었다.”
-3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