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시골 선비의 일기
조수도(趙守道, 1565∼1593)는 청송 지역의 학자로, 본관은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직(景直), 호는 신당(新堂)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조지(趙址, 1541∼1599)와 권회(權恢)의 딸 증(贈)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를 사사했다. 《신당일록》은 조수도가 1588년 1월 28일부터 1592년 9월 28일까지 약 178일간 쓴 일기다. 하루만 기록한 당일형(當日型), 처음에만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하고 다음 날부터는 일익(翌日)의 형식으로 기록해 나간 익일형(翌日型), 날마다 날짜를 기록한 월일형(月日型), 여러 날을 한꺼번에 축약해서 기록한 축약형(縮約型) 등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일기 외에 시 두 수가 독립적으로 실려 있는데, 이는 이 자료가 일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조수도의 문집을 대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89년에 후손 조용발이 원본을 정서, 번역해 고서 형태로 출간한 필사본에는 조수도의 추모 사업과 관련한 〈추모정상량문(追慕亭上梁文)〉(조성락), 〈추모정기(追慕亭記)〉(신관조), 〈묘갈명(墓碣銘)〉(유필영), 〈유적비문(遺績碑文)〉(정환국), 〈추모정운(追慕亭韻)〉(조성길 등) 등도 수록되어 있다.
178일간의 기록
조수도의 일기는 크게 네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과거와 관련한 일이다. 조수도는 1588년 2월과 159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는데, 일기에는 과거를 보기 위해 오간 노정부터, 당시 시관과 시제, 과장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 과거 제도와 그에 대한 선비들의 관심을 살필 수 있다. 또 가문을 중심으로 한 봉별의 기록은 물론이고 분주하게 보내는 세모의 풍경, 오운·이정·이칭 등 다양한 사람들과 회합하는 장면, 여러 벗들과 술을 마시거나 시를 짓는 모습 등 향촌 사대부로서의 일상사도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대 선비 계층의 새로운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셋째 내용은 조수도가 1592년 2월 3일부터 14일간 도산 서원과 청량산 일대를 유람한 기록이다. 넷째는 임진왜란을 맞아 대응한 기록이다.1592년 4월 6일부터 23일간은 청송에서의 임란 대응에 대한 기록이고, 1592년 9월 19일부터 11일간의 일기는 전쟁 와중 함안으로 가 가족의 안부를 살피는 내용이다. 그는 양친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동생 동도와 형도를 의병으로 보내고 의병 모집과 군량미 조달 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관련 사실을 기록했다.
조수도의 《신당일록》은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개성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과거 노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둔 점, 당대의 생활사 혹은 미시사를 제한적이나마 보여 주고 있는 점, 기축옥사가 일어나는 현장을 이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 등 여러 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가족 해체의 시대를 맞은 오늘날, 《신당일록》에 드러나는 조수도의 우애와 효성은 가족의 정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한다.
200자평
1588년 1월 28일, 한 선비가 아우와 함께 새벽같이 길을 떠난다. 과거를 보기 위해 고향 청송에서 한양으로 향한 것이다. 16세기 퇴계학파 학자인 조수도의 일기 《신당일록(新堂日錄)》의 시작이다. 조수도는 1588년 1월 28일부터 1592년 9월 28일까지 약 178일간의 일들을 일기로 남겼다. 진솔한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 사대부의 과거에 대한 생각과 당대의 과거 제도, 여행길의 고달픔, 지역 선비의 일상생활 모습, 도산 서원과 청량산 유람기, 임진왜란의 상황과 의병 모집 기록 등, 한 평범한 청년 학자가 16세기의 조선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지은이
조수도(趙守道, 1565∼1593)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직(景直), 호는 신당(新堂)으로 초명(初名)은 일도(一道)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조지(趙址, 1541∼1599),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조정언(趙庭彦), 증조할아버지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을 지낸 조연[趙淵, 1489∼1564. 호는 내헌(耐軒)]이다.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권회(權恢)의 딸 증(贈)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다. 그는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경북 청송군 안덕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사사했다. 어릴 때부터 지혜와 재능이 출중했으며, 자라면서 문장이 아름답고 풍부해 문단에 이름이 있었으나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고도 입격하지 못했다. 충효와 우애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유가 지식인으로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안타깝게도 1593년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옮긴이
정우락(鄭羽洛)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주로 한국 문학 사상, 한국 문학사, 동아시아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남명 문학의 철학적 접근》(박이정, 1998), 《남명 설화 뜻풀이》(남명학연구원출판부, 2001), 《남명 문학의 현장》(경인문화사, 2006), 《남명과 이야기》(경인문화사, 2007), 《남명과 퇴계 사이》(경인문화사, 2008), 《문화 공간, 팔공산과 대구》(글누림, 2009), 《남명학파의 문학적 상상력》(역락, 2009), 《조선의 서정시인 퇴계 이황》(글누림, 2009), 《영남의 큰집, 안동 퇴계 이황 종가》(예문서원, 2011), 《삼국유사, 원시와 문명 사이》(역락, 2012), 《영남을 넘어, 상주 우복 정경세 종가》(예문서원, 2013), 《한강 정구와 무흘구곡 이야기》(경인문화사, 2014), 《남명학의 생성 공간》(역락, 2014), 《모순의 힘, 한국 문학과 물에 관한 상상력》(경북대학교출판부, 2019), 《영남 한문학과 물의 문화학》(역락, 2022)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탈초 역주, 영총》(경상북도·영남문화연구원, 2007, 공역), 《역주 고대일록》(태학사, 2009, 공역), 《국역 흑산일록》(경북대학교출판부, 2019), 《후산졸언 시문선집》(지만지한국문학, 2020) 등이 있다.
차례
신당일록(新堂日錄) 서문
신당일록(新堂日錄)
1588년 1월 28일, 아우와 과거 길에 오르다
1590년 6월 10일, 다시 서울 길에 오르다
1591년 1월 6일, 아우와 함안으로 가다
1591년 2월 6일, 청송으로 돌아오다
1591년 2월 26일, 아버님의 낙마 소식을 듣다
1591년 3월 6일, 군위에서 과거에 응시하다
1591년 윤3월 6일, 말을 타고 재를 넘다
1591년 윤3월 26일, 함안으로 가다
1591년 4월 2일, 아버님을 모시고 오다
1591년 5월 21일, 영산으로 향하다
1591년 6월 26일, 오운과 이정(李瀞) 등을 만나다
1591년 7월 3일, 이당과 술을 마시다
1591년 7월 29일, 여러 벗들과 시를 짓다
1591년 10월 22일, 호랑이 때문에 재를 넘지 못하다
1591년 11월 8일, 여러 숙부님들께 인사를 드리다
1591년 11월 26일,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다
1591년 12월 22일, 함안에서 세모를 바쁘게 보내다
1592년 1월 1일, 지나가는 길에 이칭을 뵙다
1592년 1월 11일, 비 오는 날 청송을 향하다
1592년 2월 3일, 도산 서원 및 청량산을 유람하다
1592년 4월 6일, 왜구가 침입하다
1592년 9월 19일, 함안으로 가서 안부를 묻다
1592년 9월 28일, 아이가 갑자기 죽어 화현에 묻다
시(詩)
순부와 함께 도산으로 가며(與順夫向陶山)
청량산에서 제공과 함께 술잔을 나누며(淸凉山與諸公相醻韻)
조수도를 추모하며
추모정상량문(追慕亭上梁文)
추모정기(追慕亭記)
묘갈명(墓碣銘)
유적비문(遺績碑文)
추모정운(追慕亭韻)
후지(後識)
원문
신당일록 서(新堂日錄序)
신당일록(新堂日錄)
시(詩)
조수도를 추모하며
후지(後識)
해설
부록−동계 조형도의 문학적 상상력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3월 초6일. 감히 아버님의 명을 어기지 못해 구씨(舅氏, 외숙)를 모시고 적나(赤羅)에서 과거에 응시했다. 적나는 곧 군위(軍威)다.
다음 날[3월 7일] 비를 무릅쓰고 출발해 현(縣) 안으로 들어가 간신히 주인집을 정하고 향생(鄕生) 이준성(李俊成)과 함께 거처하게 되었다.
다음 날[3월 8일] 여러 동반(同伴)들을 두루 방문하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왔다. 다음 날[3월 9일]도 또한 그같이 하고, 그다음 날[3월 10일]도 그렇게 했다.
다음 날[3월 11일] 여러 동반(同伴)들과 함께 등록을 했다.
다음 날[3월 12일] 일찍 시험장에 들어가니 부제(賦題)는 〈홀의 주머니(笏囊)〉였고 시제(詩題)는 〈편지를 가는 길에 보내 생사를 알아보네(帛書間道訪存亡)〉였다. 경시관(京試官)은 신숙(申熟), 부시관(副試官)은 진주목사 최입(崔岦), 그 아래는 창원부사 장의국(張義國)이었다. 비가 많이 내려 저물녘에 나왔다.
다음 날[2월 9일] 도산(陶山)으로 가는 길에 분천(汾川)의 애일당(愛日堂)을 구경했는데 곧 농암(聾巖) 이 선생의 정사다. 그의 아들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이 선대의 세업을 이어받아 거듭 새롭게 했다. 주인이 나와 맞이해 즐겁게 술잔을 나누다가 시 한 수를 읊조리고 파했다.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올라가니 이번(李蕃, 자 언성)이 뒤따라와서 알묘를 하고 물러갔다. 선생께서 평소 물러나 기거(起居)하시던 곳을 두루 살펴보니, 선생의 침석(枕席)·궤연(几筵)·청려(靑藜)·투호(投壺)·연적(硯滴) 및 벽 사이의 도서(圖書) 등이 완연히 어제 같았다. 손을 맞잡고 늠름한 모습을 공경히 상상하노라니 따뜻한 훈계의 말씀을 듣는 듯했다. 선생은 참으로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유정문(幽貞門)·정우당(淨友塘)·절우사(節友社)·시습재(時習齋)·지숙료(止宿寮)·관란헌(觀瀾軒)을 두루 보니 선현의 옛 자취가 자못 나의 마음을 고무했다. 천연대(天然臺)로 나와서 이 군이 마련한 술을 즐겁게 마시며 각기 〈도산가(陶山歌)〉 한 곡씩을 부르고 파했다. 서쪽에는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가 있었는데 그 승경의 훌륭함은 천연대에 양보하지 않았다.
소나무 가지는 햇살을 가리고, 위의 하늘 아래의 물에선 새들이 날고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좌우의 취병(翠屛)은 움직이면서 그림자를 푸른 물에 드리우고 강산의 승경을 한 번 보고 다 얻게 되었다. 대(臺) 아래에는 탁영담(濯纓潭)이 있고 담(潭) 가운데는 반타석(盤陀石)이 있어, 또한 여섯 사람쯤 앉을 만했다. 취기에 의지해 저물녘이 되어 손을 잡고 두루 구경하다가 돌아와 애일당(愛日堂)의 자연을 유람했다. 흥이 다하고 술도 깨어 소매를 흔들며 이별했다.
〇 4월 21일, 방어사 이일이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21일, 내성(內城)과 월성(月城)이 모두 함락되었다. 이로부터 강좌(江左)와 강우(江右)에 있는 동남쪽의 여러 읍이 차차로 함몰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바람을 보면서 달아나 흩어지고, 사졸들은 갑옷을 버리고 다투어 달아나니, 하늘의 뜻과 나라의 운수가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분개심(憤愾心)을 이길 수 없었다. 방어사(防禦使) 이일(李鎰)은 상주(尙州)에서 전쟁을 지휘하다가 마침내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〇 4월 24일, 관아로 들어가 의병을 논의하다
24일, 아버님을 모시고 부중(府中, 관아)으로 들어가 방백(方伯)과 함께 의병에 대해 상의하다가 돌아왔다.
〇 4월 27일, 유사를 정해 창의토록 하다
27일, 아버님의 명으로 향사(鄕射)에 들어가 각 면의 지모(智謀)가 있는 자를 청해 유사(有司)를 의논해 정하고 그로 하여금 긴급히 창의(倡義)하도록 했다.
〇 4월 29일, 의병장을 뽑아 각 면에 전령하다
29일, 부백(府伯, 고을의 수령)이 의병장을 뽑아 각 면에 전령(傳令)했다.
〇 5월 30일, 동도와 형도가 곽재우의 의진에 들어가다
지난 5월 그믐, 곽재우(郭再祐) 공이 의병소를 설치해 각 읍의 군장(軍將)을 모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 아우 동도(東道)가 형도(亨道)를 따라 의진(義陣)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어버이가 계셔서 차마 떠날 수 없었던 까닭에 울며 위로하면서,
“어버이를 모시는 일은 오직 나에게 있으니 너는 걱정하지 마라. 나랏일은 오직 너에게 있으니 나의 뜻도 함께한다.”
라고 했다. 이로 인해 시를 읊조리며 위로하고 권면(勸勉)하며 아우를 보냈다.
28일, 밤에 갑자기 아이를 잃게 되었다. 난리 중에도 목숨을 구제했는데, 어찌 이러한 참극(慘極)에 이르게 되었는가!
다음 날[9월 29일], 화현(火峴)에서 영결을 하자니 불에 심장이 다 타는 듯했다. 가만히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면 밝게 나타나는데, 잊으려 해도 어찌 잊히겠는가? 애통하고 애통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