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18세기 호남 선비의 기록, 《이재난고》
《이재 시선》은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실린 그의 자작시 중에서 그가 한창 공부하던 젊은 시절과 관료 시절에 남긴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의 저본이 되는 《이재난고》는 황윤석이 10세 되던 해부터 세상을 떠난 때인 63세까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일기다. 거의 모두 초서(草書)로 썼는데, 전체 규모는 총 57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는 호남 지역 사회에서 선비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강화하는 한편,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한평생 노력했다. 《이재난고》는 황윤석이 지역 사회의 선비 가문 출신으로서 가졌던 삶의 자세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난고》는 중앙 정치 무대로의 진출 노력과 좌절을 기록한 한 지방 선비 가문의 일대기이자 서양 문물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해 간 한 전통적 지식인의 자서전이며, 18세기 한양의 활기찬 학문 풍토에 동참한 박학한 선비의 박물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청년 학자의 고뇌
《이재난고》 속에는 약 1630제(한 제목 속에 여러 편의 시가 있는 경우가 많다)의 한시가 담겨 있다. 그의 시에는 산문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의 주요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이재 시선》은 그중 작품성과 대중성이 높은 작품을 선별해서 소개하려 한다. 그중 두 번째인 이 책은 이재 황윤석의 19세부터 29세까지의 시 100제를 모아 놓은 것이다. 한창때인 이 시기, 그는 학문과 과거 시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공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마음가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서서히 학문과 입신양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며 점차 성장해 나간다.
200자평
18세기 호남 선비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 가운데 중요한 시들을 가려 묶었다. 그는 10세부터 세상을 떠나는 63세까지 53년간 총 57책에 달하는 일기를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 약 1630제의 시가 들어 있다. 호남을 중심으로 한 18세기 지방의 세태와 도시적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던 한양의 분위기를 함께 읽을 수 있다. 《이재 시선 2》에는 황윤석의 19세부터 29세까지의 시 100제를 수록했다. 학문과 과거 시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부터 공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마음가짐, 학문과 입신양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점차 성장해 가는 젊은 선비 황윤석을 만날 수 있다.
지은이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1729년(영조 5) 4월 28일 전라도 흥덕현 구수동(현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황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6세의 나이 때부터 할머니 김씨 부인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고, 7세에 《소학》을 배우면서 《사기》와 사서오경을 두루 읽게 되고 제자백가까지 열람했다. 6세에 쉬운 글자를 맞추어 시를 짓는 법을 할머니로부터 배웠고, 9세 때에는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뛰어난 재주가 알려졌다.
황윤석의 자(字)는 영수(永叟)이며, 호(號)는 이재(頤齋)·이재려인·실재·서명산인·운포주인·산뢰·산뢰노인·산뢰려인·산뢰산인·산뢰수·순양자·월송외사 등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주역》의 산뢰이괘(山雷頤卦)를 인용해 서실에 이(頤) 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말을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한다’는 뜻을 명심하게 해 주로 ‘이재[頤齋, 《주역》 이괘(頤卦)의 내용을 실천하겠다는 뜻]’를 사용했다.
14세에 임영(林泳, 1649∼1696)의 《창계집(滄溪集)》을 읽고 세상의 시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6세에 그의 책 중 하나인 《이수신편(理藪新編)》을 쓰기 시작했다.
황윤석은 24세 무렵을 시작으로 평생 동안 26차례에 걸쳐서 한양의 과거에 응시했고 이를 위해 22차례나 서행(西行, 한양행)을 했다.
어려서는 집에서 수업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양응수와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31세에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했고, 여러 번 대과(大科)에 응시했지만 운이 없었던 탓인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 학문이 호남 인물 중 최고라고 알려져 1766년(영조 42) 그의 나이 38세에 장릉참봉의 벼슬을 받았다.
3년간 장릉참봉을 지내고, 40세에는 의영고 봉사, 41세에는 사포서와 종부사 직장, 43세에는 6품직으로 올라 사포서 별제가 되었다. 48세 되던 1776년(영조 52)에는 익위사 익찬, 50세에 사복시 주부, 그해 12월에 장릉령이 되었고, 51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평소의 꿈이었던 현감이 되었다. 목천현감의 직함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늘 꿈꾸었던 현감의 직위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재와 함께 일하던 아전들이 창고의 곡식을 도적질해 유용한 것을 차마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독촉해서 반납시키려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세금을 함부로 처리했다는 죄로 인사고과 성적이 하(下)가 되었고,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56세에는 장악원 주부와 창릉령의 벼슬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장례 기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58세에는 전생서 주부에 이어 전의현감의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암행어사가 전의에 출두해 황윤석이 전년도에 처리했던 일을 사적인 감정에 따라 처리한 것으로 여기고 이재를 파직시켰다. 파직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집안의 일들을 정리하며 한양의 정치에도 늘 귀를 기울였다. 그 후 63세에 자신의 집 만은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이상봉은 1974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석사 과정 중에 이재난고 역주사업단에서 일하면서 호남 지식인 황윤석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황윤석의 한시를 대상으로 석·박사 논문을 썼다. 이후에도 황윤석을 비롯해 부산 지역 한시·《시경》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역서에 《역주 이재난고》(전20권, 공저, 2015), 《이재난고의 풍경과 서정》(2022), 《이재 시선 1》(2022) 등이 있고, 주요 논문에 〈청년 황윤석의 한시에 나타난 경세(經世) 포부와 자기반성〉(2014), 〈황윤석 한시에 나타난 가족애의 양상−〈월주가〉를 중심으로〉(2015), 〈황윤석과 민어(民魚), 그 수수(授受)의 의미〉(2015), 〈이재 황윤석 한시의 두보 시어 활용 양상〉(2015),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소실(小室)에 대한 사랑〉(2016), 〈이재 황윤석 한시의 ‘사(絲)’ 의상(意象) 운용 양상〉(2017), 〈흥상(興象)의 구체적 의미에 대한 연구〉(2018), 〈‘풍신(風神)’의 용례에 대한 일고(一考)〉(2020), 〈〈관저(關雎)〉의 수용 양상과 주요 논의에 관하여〉(2020), 〈〈녹명(鹿鳴)〉의 수용 양상과 주요 논의에 관하여〉(2020), 〈해운대의 추억−한시에 형상화된 해운대〉(2021), 〈현감직에 대한 황윤석의 갈망과 소회〉(2022), 〈부산 동래의 기억−정추의 동래 회고(東萊懷古)에 대하여〉(2022), 〈《시경(詩經)》·〈종사(螽斯)〉의 활용 양상에 대해서〉(2023) 등이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과 한문학과에서 교양과 전공 강의를 하고 있다.
차례
잡다한 시 여덟 수
옛날 〈사수시(四愁詩)〉를 본떠서 짓다
밤에 앉아
《역(易)》의 이치를 헤아린 노래
도사(都事) 안 척숙(安戚叔)께서 부모님 뵈러 가신다기에 받들어 이별하다
대역(大易)의 노래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다
앞 시의 뜻을 거듭하면서 내 뜻을 말한다
절구
비단 주머니
서당에 비 내린 뒤 계곡물 소리를 듣고 느낀 점이 있어서
옛 시를 본받아
마음대로 짓다
즉흥시
12월 5일 밤 꿈에 송씨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꿈에서 깬 뒤에 아련한 마음이 있었다
또
입동에서 소한까지 눈이 겨우 두 번 내렸는데 게다가 많이 오지도 않았다. 오늘은 비가 조금 내려 정말 봄날 같았다. 내년 농사가 과연 어찌 될지 모르겠다. 우선 시로 기록한다
여러 가지를 읊다
섣달그믐 나흘 전에 큰 눈이 왔다
무진년(1748) 정월 초하루 비로소 용성(龍城)으로 출발했다. 용두산을 지나다가 아버지 말씀을 기록했으니 느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능암에서 자다
운암강(雲巖江)
정오(正午)에 갈담역(葛潭驛)에서 쉬다
한치(寒峙)에 올라 보현봉(普賢峰)을 바라보다
팔공산(八公山)을 바라보다
나그네 마음
객지에서 노 형과 헤어지고 김씨 아저씨도 돌아가시니 불편한 마음이 멈추지 않았다. 손님 중에 취해서 장난치는 사람이 운(韻)을 부르기에 마침내 그것으로 내 마음을 풀었다
매화 그림
절구
다음 날 아침, 손님이 경(庚) 자 운(韻)을 차운해서 보내셨기에 또 그 운에 따라 답장으로 부쳤다
또 앞의 운을 써서 부쳐 드리다
손님이 또 경운(庚韻)으로 첩운(疊韻)해서 내 시에 취한 것을 놀리는 뜻이 있었다며 꾸짖기에 내가 다시 차운해서 사죄를 드렸다
또 첩운해서 부쳐 드리다
또 앞뒤의 운(韻)을 따서 지었다
또 율시 한 수로 이별하다
백씨 어르신께서 원일(元日)에 시를 지어 주셔서 거기에 첩운해서 한 편을 완성했다. 겸손함이 너무 지나치시기에 공경히 차운하면서 그런 뜻을 드러냈다
백씨 어르신께서 내가 길을 떠날 때 지어 주신 시를 받들어 차운해서 세 편의 시를 드리다
정월 15일에 고향의 풍속이 눈앞에 펼쳐진 것을 서술하면서 배해체(俳諧體)를 본떠 흥이 나서 짓다
월식
또 이별의 운(韻)으로 부쳐 드리다
시사 감흥
밤비 속에서 앓다가 마침 아내를 꿈속에서 보고 회포를 기록하다
선포 서당
잡시
편지를 대신해서 정사도에게 부치다
월곡(月谷)
정사도의 심성재(尋性齋)에서 짓다
사우재(四友齋)께 드리다
신미년 춘축(春祝)
돌아오는 길에
정사도에게 부치다
달밤에 홀로 앉아
길에서 우연히 짓다
정오에 정읍의 연조원에서 쉬다
해 질 무렵에 피향정을 지나다
아침에 출발해서 금구(金溝) 주막에 도착했고, 정오에 이성가(伊城街)에서 쉬다
아침에 출발해서 여현(礪峴)을 지나다
정오에 은진 주막에서 쉬다. 사교와 초포교를 지나 미륵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이산(尼山)으로 향하다
금강에 도착하다. 강의 남쪽 언덕에 제승루가 있다
오후 4시쯤에 궁원 아래 주막에서 말을 먹이다
척수루(滌愁樓)에 올라
9월 4일 아침에 출발해서 소사(素沙)를 지나다
갈원(葛院)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다
9월 5일 아침에 출발해서 사기천을 지나 갈산 주막을 거쳐 과천 주막에 도착해 아침을 먹다
재동에 머물 때 잠 못 들어 구점(口占)으로 안성능 아저씨께 드렸다
우연히 쓰다
9월 27일 날이 밝은 뒤에 천천히 가서 소사교 주막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마침 비가 오려는 듯해서 갈 길이 염려되었다. 주막 곁 높은 구릉에 잠곡 김 상공의 대동비(大同碑)가 있었다. 이민구 찬술에 오준의 글씨로 순치(順治) 16년에 세웠다. 바로 조선 효종 10년 기해(1659)다
9월 28일 새벽 3시경에 천안을 출발해서 20리를 가자 그믐달이 비로소 나왔다
9월 30일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떠나면서 종이를 찾아 얼른 써서 김호숙에게 주었다
10월 1일 아침에 출발해서 두죽호 옆에서 밥을 먹고, 금구에 도착해서 말을 먹였다
절구(絶句)
머무는 곳이 바로 서석산과 마주하고 있어서 시를 지었다
절을 떠나 월곡으로 향하며
느낀 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다
마음대로 노래하다
설산에서 여러 가지를 노래하다
누나와 작별할 때 붓을 찾아 벽에 쓰다
여산을 지날 때 시를 지었다
금강에서
여러 친구들이 또 찾아왔다. 양성의 신동(申童)을 만났는데 과거장에서 동접(同接)이 되기로 했다. 듣건대 그의 조상은 지극히 친한 사이였고, 또 서로 왕래하면서 더욱 가까운 사람도 있었다. 절구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망우 고개
광릉을 지나는 도중에 미음(渼陰) 30리를 뒤돌아보며
성환을 지날 때 시를 지었다
금광 주막의 벽에 짓다
10월 7일 새벽에 출발했다. 삼례에서 시를 지었다
느낀 점이 있어서
피향정의 옛 추억
밤에 앉아
또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고향으로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며 느낌을 썼다
혼자서 쓰다
흥덕동
벽송정
공경을 담아 미호 김원행 선생님께 드리다
성균관에서 국화를 보고서
동사생(同舍生) 유자눌이 율시 한 수를 지어 주기에 그에 답했다
안사성에게 써 주다
안사성에게 드리다
노량진 나루터에서
민절 서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후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다 (절구 두 수)
누군가 묻기를 “옛날에 현명했던 사람들은 모두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니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진짜 선비가 되지요.
그대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부디 우리나라 사람과 송나라 사람을 보세요”.
내가 말하길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스스로 넉넉함이 있어서니
과거 합격 한 가지에만 매여 있지 않았지요.
만약 그대 처음 말이 옳다면
요즘 사람들 모두 송나라 때 선비와 같겠지요”.
答或人問 (二絶)
人問先賢盡出身, 出身方做大儒眞.
如君若不吾言信, 請看東人與宋人.
我謂爲賢自有餘, 非從科目一窠拘.
如君只把初頭說, 今世人將盡宋儒.
비단 주머니 (두 수)
동그란 무늬 비단을 오려서
입구를 오므릴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었네.
향내 나는 먹과 귀한 붓을
모두 이 안에 담아 둬야지.
한 번 묶자 용(龍)이 큰 연못에 웅크린 듯하더니
한 번 풀자 봉새가 왕의 정원에서 뛰노는 듯하네.
그 안에 보배를 담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밖으로 꽃송이를 토해 낼 수 있었을까?
錦囊詩 (二章)
剪出盤紋錦, 縫成招口囊.
蘭煤銀不律, 都與此中藏.
一括而龍蟠大澤, 一脫而鳳躍王庭.
非厥中之蘊珍, 豈其外之吐英.
또
한 해도 벌써 절반이 지나서
가을날 생각이 정말 깊어지네.
역(易)을 공부해도 하도와 낙서에 어둡고
단약에 공들였지만 화로와 약사발 깨어졌네.
길이 갈라지자 양자(楊子)처럼 통곡하고
수레 길 끝나자 완 공(阮公)인 양 슬퍼하네.
다 버리고 나니 도리어 웃음이 나는데
하늘에서 바람이 나를 위해 불어오네.
又
一年已絶半, 秋思政悠哉.
易學圖書晦, 丹功鼎器頹.
多歧楊子哭, 窮轍阮公哀.
棄置還成笑, 天風爲我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