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레터 [주간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이론서를 읽다 보면 반가운 문학 작품들을 자주 만납니다. 온갖 군상 사이 벌어지는 일들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 낸 문학 작품들은 항상 사상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지나친 이야기의 한 대목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뻗어 나가는 사유를 따라가는 일은 자못 흥미롭습니다. 이번 인티에서는 컴북스이론총서에서 다룬 두 명의 사상가와 그들이 읽은 문학 작품을 엮어 소개합니다. 문학을 더 넓게, 더 깊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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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아 크리스테바≫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사상가입니다.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을 접목해 모성과 여성 신체를 새롭게 해석하고 개별 여성의 특이성에 기반한 새로운 페미니즘을 정초했습니다. 크리스테바의 독창적인 개념들 중에서도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여겨져 경계 밖으로 배제된 것들을 뜻하는 “애브젝트” 개념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안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토대가 됩니다. 특히 선천성 감각 운동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이 있는 크리스테바는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데, 이때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어린 에욜프≫에서 큰 영감을 얻습니다.
정연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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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에욜프≫
헨리크 입센은 근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며 오늘날에도 여전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작가입니다. 이 책은 입센의 후기 산문 희곡 열두 편 중 하나로, 거칠고 사실적인 사회 비판에서 상징주의와 은유, 시적인 세계로 옮겨 가는 극작 스타일 변화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입니다. 복합적인 인간 심리에 기반한 복잡한 사건들이 전개되며 희곡의 근간을 이루는 ‘공포’와 ‘고양’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구현합니다. 오늘날 다양한 시도로 미학적 잠재력을 입증하는 공연이 무대에 오르고 있으며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로도 각색되고 있습니다.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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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는 ≪어린 에욜프≫에서 장애를 지닌 아들의 모습을 통해 어머니가 인간성을 되찾는 순간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크리스테바는 입센의 희곡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장애를 지닌 사람과의 만남이 기독교와 계몽주의에 입각한 전통적 휴머니즘 개념에 도전할 수 있게 하고, 이성이 아닌 정서에 기반한 새로운 휴머니즘에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테바의 새로운 휴머니즘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으로 각 사람의 독특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심지어 사랑하는) 휴머니즘이다. 이는 인간성에 대한 개념뿐 아니라 가정에 대한 확장된 개념도 필요로 한다.
_≪쥘리아 크리스테바≫, “경계를 가로지르는 쥘리아 크리스테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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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바르부르크는 도상학의 정초자이자 문화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미술사학자입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 언어와 대표적 기억 매체인 이미지에 깊이 천착해 미술사의 지평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 방대한 학문 세계의 토대가 되는 개념이 바로 ‘양극성’입니다. 바르부르크는 인간 정신이 도취적 감정 분출과 감정을 중화하는 이성, 즐거움과 위험, 열정과 위협 등 상반된 두 극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진동한다고 보았습니다. 아울러 이미지·예술·문화가 ‘중간공간’에 위치하며 양극 사이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에서 산출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양극성’은 바르부르크가 처음 제시한 개념이 아닙니다. 바르부르크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들을 읽고 괴테의 양극성 개념을 재발견하며, 이는 문화학에 대한 바르부르크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로 꼽힙니다.
김보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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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 독일에서 활동한 괴테는 문학, 철학, 자연과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바이마르 공국의 장관을 지내기도 한 인물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괴체는 문화다”라고 언급할 만큼 당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책은 지인의 사연과 자신의 경험담을 적절히 배합해 쓴 작품으로, 젊은 시절 괴테의 내면생활이 잘 드러납니다. 출간 당시 전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베르터의 복식과 말투를 흉내내기도 했고, 심지어 결말을 좇아 자살하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이영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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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부르크가 괴테의 ≪식물변형론≫을 읽고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1907년 5월 25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창안했다고 생각한 양극성 개념이 괴테 사상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문제는 양극화가 인간의 개인적 자기감정 에너지에 가한 변형과 관련이 있다. 양극화는 고대의 에너지가 고조되었던 기억 이미지를 회복할 때 생겨난다. 복원된 기억으로 인한 역동적 양극화.” … 괴테에게 양극성은 모든 자연 현상과 인간의 삶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원리였다. 이를테면 ≪젊은 베르터의 고뇌≫(1774)에서 베르터가 입은 노란 조끼와 청색 연미복,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6) 속 대척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나타나는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상반된 가치, ≪색채론≫(1810)에서 색이 지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대립으로 제시되는 황색과 청색의 대비 모두 양극성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_≪아비 바르부르크≫, “03 양극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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