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극빈의 표백과 오키나와라는 토포스
야마노쿠치 바쿠(山之口貘, 1903∼1963)는 오키나와 출신 일본 시인이다. 바쿠(貘)는 펜네임으로 인간의 악몽을 먹어 치운다는 맥(貘)이라는 상상의 동물 이름에서 차용했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다. 수소폭탄이나 원자폭탄을 날름날름 삼키는 맥처럼(<맥>) 바쿠의 시 쓰기는 인류의 재앙을 삼켜 언어로 되새김질하여 정화해 뱉어 내는 일종의 종교적 의식과도 같았다.
바쿠의 시 세계를 형성하는 축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극빈의 표백이다. 참담한 극빈 속에서도 꿋꿋이 지탱되던 표랑 의식이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생을 포기할 결심도 하지만 시 쓰기에 강한 미련이 남아 죽은 셈 치고 살아남았다고 고백하듯(<자전>) 인간 주자부로는 시인 바쿠로 생존하여 극빈의 고통을 역공으로 삼아 목숨을 걸고 언어와 사투를 벌여 온 것이다. 그는 때로 유쾌하게 때로 애처롭게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자신의 민낯을 당당히 보여 줄 것이다.
다음 축은 오키나와라는 토포스다. 제국 일본과 대립하는 식민지 류큐 오키나와, 근대 문명 도시 도쿄와 대립하는 아열대의 풍토색을 한 오키나와, 그 아름다운 자연색과 독특한 전통과 얽히고설킨 근대 이후의 정치 지형도를 몸으로 맞닥뜨린 오키나와를 도외시하고 바쿠의 시 세계에 다가서기는 힘들다. 바쿠는 류큐 왕국(1429∼1879) 성읍지 나하(那覇)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미술 교사인 장형의 영향으로 화가를 꿈꾸던 주자부로는 그림을 배우고자 제국의 수도 도쿄로 상경한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 파산으로 학비 조달은 끊기고 그 근대 도시 문명으로 뒤덮인 거리를 표랑한다.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1923)을 맞아 원고 가방 하나 들고 귀향하지만 오키나와에서 역시 비참한 노숙 생활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막다른 길목에서 다시 원고 가방 하나 들고 상경하게 되어 이후 서른 중반이 될 때까지 일정의 직업도 없이 주소도 없이 가난 시인이란 명함 하나 달랑 들고 거리와 지인의 집을 왕복하게 된다(<자전>). 그리하여 화려한 근대 도시 도쿄에서 숙명적으로 맞닥뜨린 것은 제국 일본의 부조리한 민낯이었다. 곳곳에 ‘조선인과 류큐인은 출입을 금함’(수필 <나의 청춘시대>)이란 문구가 내걸렸고 대지진 후의 조선인 학살 사건과 같은 악몽을 목도해야 했다(수필 <노숙>). 그리하여 도피하듯 이 시인은 극빈을 노래로 자아내는 데 대부분의 창의력을 소모한다.
이 선집에는 다채로운 바쿠의 초상을 만날 수 있는 시 98편을 선별했다. 그의 시의 문체적 특징은 평명함과 간결함이다. 바쿠 시에 창작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인 및 소설가 사토 하루오(佐藤春夫)는 나무를 스치는 바람과 같다고 비유했다. 절친한 시인 가네코 미쓰하루는 진정한 구어체 확립을 완수했다고 극찬했다. 또 오키나와 대표 시인 다카라 벤(高良勉)은 단 한 마디도 문어체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평한다. 바쿠는 한 편의 시를 위해 100매고 300매고 퇴고를 거듭했다. 그 완고한 창작 과정은 근엄한 문어체에 오염된 개념을 벗겨 내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200자평
일본 내 변방인 오키나와 출신의 대표 시인, 야마노쿠치 바쿠. 그는 한 편의 시를 위해 100매고 300매고 퇴고를 거듭했다. 이는 근엄한 문어체에 오염된 개념을 벗겨 내는 과정이었다. 시인이자 소설가 사토 하루오는 바쿠의 문체적 특징인 간결함을 나무를 스치는 바람과 같다고 비유했다. 시인 가네코 미쓰하루는 바쿠야말로 일본 현대시에서 진정한 구어체 확립을 완수했다고 극찬했다.
바쿠의 시 중 문학성이 높은 98편을 가려 뽑아 소재별로 묶었다. 또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그의 수필 5편을 곁텍스트로 실었다. 오키나와인으로서의 정체성 고민, 시문학이라는 장르에 대한 고찰 등을 작가의 목소리로 들어 볼 수 있다.
지은이
야마노쿠치 바쿠(山之口貘, 1903∼1963)는 오키나와 출신 일본 시인이다. 바쿠(貘)는 펜네임으로 인간의 악몽을 먹어 치운다는 맥(貘)이라는 상상의 동물 이름에서 차용했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다. 바쿠를 수식하는 표현으로는 가난 시인, 룸펜 시인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명찰이 있다. 노숙자 시인, 방랑 시인, 서민 시인, 민중파 시인, 자연인, 지구 시인, 풍자 시인, 유머 시인, 반골 정신, 정신적 귀족 등등이다. 유파로는 역정파(歷程派, 1935∼)에 속한다. ‘역정’이란 잡지명으로 이 유파는 특정 사조로 일괄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바쿠는 제2차 역정파에 귀속되는데 그들의 공통점으로는 서민적 감각과 충일한 생명력, 그리고 반항 정신을 들 수 있다.
옮긴이
경상국립대학교 사범대학 일어교육과 교수다. 한국에서는 한국근대문학으로 학부, 석사 논문을 작성했고 일본에서는 일본근대문학으로 석사, 박사논문을 작성했다. 이후 한일비교문학과 오키나와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예술가적 존재방식 연구》, 번역서로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마키노 신이치 단편집》 등이 있다.
차례
오키나와 관련 시 : 오키나와여! 어딜 가려느냐!
대화(會話)
폭격 맞은 섬(弾を浴びた島)
섬에서 불어온 바람(島からの風)
세상은 요지경(世はさまざま)
설날과 섬(正月と島)
맑은 하늘(晴天)
오키나와 풍경(沖縄風景)
가지마루 나무(がじまるの木)
파초포(芭蕉布)
설 아침 풍경(元旦の風景)
복사꽃(桃の花)
섬에서의 이야기(島での話)
오키나와여! 어딜 가려느냐!(沖縄よどこへ行く)
시인 및 창작 관련 : 하늘에서 강림한 언어
자기소개(自己紹介)
형님 편지(兄貴の手紙)
박학과 무학(博学と無学)
살아갈 날들(生きる先々)
12월 어느 날 밤(十二月のある夜)
지면 위(紙の上)
첫 시집(初詩集)
그의 전사(かれの戦死)
내 시(僕の詩)
결혼(結婚)
코의 어떤 결론(鼻のある結論)
첼로(チェロ)
고개 치켜들고(首をのばして)
추억(思い出)
그날 그때(その日その時)
은밀한 대결(ひそかな対決)
맥(貘)
하늘에서 강림한 언어(天から降りてきた言葉)
노숙 생활 : 남루는 잠들어 있다
야경(夜景)
방석(座蒲団)
구걸 이야기(ものもらいの話)
꿈에서 깨어나(夢の後)
이사(轉居)
꼼짝달싹 못 하고(立ち往生)
지친 일기(疲れた日記)
하늘(天)
돌(石)
생활의 무늬(生活の柄)
누더기는 잠들어 있다(襤褸は寢ている)
극빈 : 생존의 위치
재회(再会)
밤(夜)
제대로 먹지 못한 나(食いそこなった僕)
식인종(食人種)
숯(炭)
자문자답(自問自答)
무제(無題)
뜸을 뜨다(灸をすえる)
커피집(珈琲店)
거울(鏡)
광선(光線)
생존의 위치(生きている位置)
연애 관련 : 구혼 광고
산책 스케치(散歩スケッチ)
첫인상(第一印象)
인사(挨拶)
맹아(萌芽)
좌담(座談)
엽서(端書)
형편(日和)
입술 모양 양심(唇のような良心)
현금(現金)
우산(傘)
만약 여자를 잡으면(若しも女を掴んだら)
장난감(玩具)
구혼 광고(求婚の広告)
결혼 생활 : 골머리 싸맨 우주인
다다미방(疊)
길모퉁이(曲り角)
어느 가정(ある家庭)
그의 부인(かれの奥さん)
빛바랜 약속(萎びた約束)
문패(表札)
참견꾼(野次馬)
골머리 싸맨 우주인(頭をかかえる宇宙人)
가족애 : 미미코의 독립
여동생한테 보내는 편지(妹へおくる手紙)
상행열차(上り列車)
새해 첫 꿈(初夢)
또 시작됐네(またはじまった)
부녀(親子)
달맞이꽃 담론(月見草談議)
미미코의 독립(ミミコの独立)
사유 관련 : 참치에다 정어리
피(血)
매너리즘의 원인(マンネリズムの原因)
장례 있는 풍경(喪のある風景)
존재(存在)
복숭아나무(桃の木)
꿈꾸는 신(夢を見る神)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만사 성가실 때(大儀)
비와 이발소(雨と床屋)
음악(音樂)
말뚝(杭)
양배추(きゃべつ)
성당의 동정녀(教會の處女)
고양이(猫)
쥐(ねずみ)
참치에다 정어리(鮪に鰯)
부록
자전(自伝)
노숙(野宿)
오키나와 귀향 시말기(沖縄帰郷始末記)
시란 무엇인가(詩とはなにか)
오키나와 야마토구치(おきなわやまとぐち)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세상은 요지경
사람은 밥을 먹고 산다
내 이름과 같은
맥(貘)이란 짐승은
꿈을 먹고 산단다
양은 종이도 먹고
빈대는 피를 빨아 먹으러 온다
사람한테는 또
사람을 삼키러 오는 자나 사람을 삼키러 가는 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오키나와에는
우무마란 나무가 있다
나무로서 생김새는 별로지만 시인 같은 나무인 거다
늘 무덤가에 서 있어서
거기 와 엎드려 우는
구슬픈 곡소리나 눈물 먹고 자란다는
우무마라는 기묘한 나무도 있다
맥(貘)
악몽은 맥더러 삼키게 하라고
옛날부터도 전래돼 오고 있다만
사람 꿈 먹고 사는 동물로서
맥 이름은 세계에서 유명한 거다
난 동물박람회에서
처음으로 맥을 본 거지만
가나의 ‘ノ’ 모양처럼 자그만 꼬리가 있고
코는 마치 코끼리 코를 축소한 것 같다
성기게 갈기가 나 있어서
말하고 좀 닮았지만
돼지하고 하마가 혼종된 듯한 몸체다
땡그란 눈 하고 입을 우물거리기에
한데 꿈도 먹고 있는 걸까 하고
먹이통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그게
꿈 아닌 실물의
과일이나 당근 따위를 먹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날 밤 난 꿈을 꾸었다
허기진 커다란 맥이 느릿느릿 나타나
여기 악몽이 있었네란 듯
원자폭탄 날름 삼켜 버리고
수소폭탄 날름 삼키나 싶더니
확 지구가 밝아져 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