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수정궁 낙성식에 참여했다가 온갖 바람을 맞아 죽을병에 걸린 남해 용왕 광리왕. 용왕의 병을 치료할 토끼의 간(肝)을 구하기 위해 육지에 올라온 자라. “수궁으로 이사하면 병조판서는 이미 떼어 둔 당상”이라는 자라의 꾐에 넘어가 수궁으로 가지만, 신통한 꾀를 써 위기를 벗어나는 토끼. 우리에게 익숙한 토끼와 자라 이야기는 《토끼전》, 《별주부전》, 《토생전》, 《토처사전》, 《토별산수록》 등 전하는 이본만 120종이 넘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토의 간(兎의 肝)》의 저본이 된 것은 판소리 〈토끼 타령〉이다. 이해조는 판소리 창극에서 구연되고 있던 〈토끼 타령〉을 듣고 이를 산정(刪正, 쓸데없는 것을 없애 바르게 하다)해 1912년 6월 9일부터 7월 11일까지 《매일신보》에 《토의 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춘향전》을 개작한 《옥중화》, 《심청전》을 개작한 《강상련》의 성공과 인기에 힘입어 《토의 간》까지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끼와 자라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정작 《토의 간》의 형식은 낯설다. 난해한 한문고투의 문장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에 비해 해학과 말장난이 특히 두드러지는 《토의 간》은 더욱 심하다. 광리왕의 병을 묘사하기 위해 각종 한의학 지식이 동원되고, 수궁 조정 신하들을 묘사하기 위해 수십 명의 중국 고대 인물의 행적이 나열된다. 토끼와 자라는 서로를 속이기 위해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들먹이는가 하면, 산과 바다를 오가는 여정의 풍광을 중국의 한시를 원용해 묘사한다. 바다와 육지를 가로지르는 말의 성찬인 것이다.
이해조의 판소리 개작 소설은 근대 문학기 활자본 고전소설이 성행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활자본 고전소설의 인기는 당시 근대 문학자들에게 반가운 현상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서사문학을 창조하기 위해 근대 작가들은 ‘과거 언어와의 결별’을 지향했다. 한문과 이별하고 언문일치체의 한글소설을 창작해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미덕이 꼭 ‘새로움’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 ‘근대’의 요구에 의해 훼손된 전통 서사의 수사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해조의 판소리 개작 소설은 우리 문학의 가장 풍성한 ‘말의 성찬’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 이해조의 판소리 개작 소설 4종을 동시에 소개합니다.
《춘향전》을 개작한 《옥중화(獄中花)》(이해조 저, 권순긍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심청전》을 개작한 《강상련(江上蓮)》(이해조 저, 권순긍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흥부전》을 개작한 《연의 각(燕의 脚)》(이해조 저, 장유정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토끼전》을 개작한 《토의 간(兎의 肝)》(이해조 저, 장유정 역, 지만지한국문학, 2024)
200자평
신소설 작가로 알려진 이해조는 널리 구연되고 있던 대표적인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 타령〉을 산정(刪正)해 신문이라는 근대적 매체 안에서 활자화했다. 듣기 텍스트를 읽기 텍스트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토끼의 간’이라는 뜻의 《토의 간(兎의 肝)》은 용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육지에 온 자라에게 속아 수궁에 갔던 토끼가 신통한 꾀로 위기를 벗어나는 토끼와 자라 이야기를 새롭게 개작한 작품이다. 1912년 6월 9일부터 7월 11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작품으로 바다의 짭짤한 감촉과 육지의 아기자기한 유머가 뿜어내는 풍자의 묘미가 담겨 있다.
지은이
이해조(李海朝, 1869∼1927)는 친일 개화 노선을 지향한 이인직(李人稙, 1862∼1916)과 달리 애국 계몽 노선을 표방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10대 손으로, 이철용(李哲鎔)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이며, 필명은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居士) 등을 사용했다.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목되는 작품인 《자유종(自由鐘)》(1910)은 봉건 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 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 풍속의 개량 등 계몽 의식이 두드러진다.
처첩 문제, 계모의 박해 등을 보여 주는 《빈상설(鬢上雪)》(1908)·《춘외춘(春外春)》(1912)·《구의산(九疑山)》(1912)이나 미신 타파를 내세운 《구마검(驅魔劍)》(1908), 일반적인 젊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의 사연에 중점을 둔 《화세계(花世界)》(1911), 《원앙도(鴛鴦圖)》(1911), 《봉선화(鳳仙花)》(1913) 등 36편의 작품을 발표해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 모두 봉건 부패 관료에 대한 비판, 여권 신장, 신교육, 개가 문제, 미신 타파 등의 새로운 근대 의식과 계몽 의식을 담고 있다.
특히 1912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등의 판소리를 명창 박기홍(朴起弘) 조(調)나, 심정순(沈正淳)의 창(唱)을 듣고 각각 《옥중화(獄中花)》, 《강상련(江上蓮)》, 《연의 각(燕의 脚)》, 《토의 간(兎의 肝)》 등으로 산정(刪正)해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도 출판해 ‘활자본 고소설(이야기책)’의 유행을 주도했다.
옮긴이
장유정(張有廷)은 성균관대학교에서 〈활자본 고소설과 식민지 모더니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 딱지본 《무학대사전》(2021), 《요절초풍 익살주머니》(2022) 등이 있다.
차례
제1장 용왕의 병이 깊구나
제2장 수궁 조정 비린내가 종로 어시장이네
제3장 별 주부 육지 나가 토끼를 생포하리
제4장 윗자리를 차지할 동물 누구인가
제5장 호(虎) 선생이오? 토(兎) 선생이오?
제6장 토 생원 벼슬하러 수궁가네
제7장 가마를 대령하라, 아니 주리를 틀라
제8장 토끼 간(肝) 없이 왔사오니 원통하오
제9장 명약을 내리니 용왕 살았구나
제10장 죽을 고비마다 주둥이가 명의로세
해설 : 바다와 육지를 가로지르는 말의 성찬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소신이 인간 세상에 초행이라. 토끼 모양을 모르오니 용모파기를 그려 주옵소서.”
(…)
토끼 화상을 그릴 적에 동정유리청홍연(洞庭琉璃靑紅硯)에 오징어 불러 거북 연적에 비단처럼 맑은 가을 물결 같은 먹을 갈고, 그림 그리는 고운 붓에 덤벅 먹을 묻혀 희고 얇은 좋은 종이에 이리저리 그릴 적에, 천하 명산 경개(景槪) 보던 눈 그리고, 불로초가 있다는 중국 전설의 산인 봉래(蓬萊)에서 냄새 잘 맡는 코 그리고, 난초 국화 온갖 향초 꽃 따 먹던 입 그리고, 두견 앵무 지지지 우는 소리 듣던 귀 그리고, 만화방창(萬花方暢) 꽃나무로 이루어진 숲을 펄펄 뛰던 발 그리고, 백설(白雪)이 펄펄 흩날릴 제 바람 막아 주는 털 그렸더니.
그 모양이 두 눈은 도리도리, 두 귀는 쫑긋, 허리는 말랑, 꽁지는 몽똑! 왼편에는 청산을 오른편에는 녹수를 푸른 산과 푸른 물 청산녹수 깊은 곳에 빽빽한 소나무 늘어져 있는데 계수나무 그늘 속에 들락날락 오락가락 엉거주춤 뛰는 양 토끼를 그려 놓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