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행장, 삶의 간명한 기록
《주자 행장》이란 주희(朱熹, 1130∼1200)의 생애와 행실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행장(行狀)’이란 한문 문체의 하나로서, 역사 편찬이나 개인의 전기(傳記)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한 글을 말한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고인의 세계(世系), 성명, 관향(貫鄕), 자호(字號), 관작(官爵), 생졸 연월일, 자손록(子孫錄)과 같은 생애적 사실 및 평생의 언행이 포함된다. 행장은 전기(傳記)보다는 단순하며, 여기에 잡다한 내용의 글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슷한 성격의 글인 행록(行錄), 가장(家狀), 묘지명(墓誌銘), 묘갈명(墓碣銘)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형식의 문체다.
주자학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
《주자 행장》은 주자학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다. 이것은 주희 사후 20년 되던 해에 막내아들인 주재(朱在)의 요청에 따라 주희의 제자이자 사위인 황간(黃榦)이 찬술한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주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가장 권위 있고 깊이 있는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황간은 《주자 행장》 ‘부록’에서 행장 저술과 관련해 “내가 선생의 행장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어서인데, 선생의 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이것을 전하는 이들이 잘못 전할까 두려워해서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행장 찬술의 목적이 주희의 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주자학 최고의 권위자, 퇴계 이황의 주석
《주자 행장》과 관련해 특별한 인연을 지닌 조선의 학자가 있다. 바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다. 이황에게 주희는 이론적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성인의 경지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전인격적으로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이황은 주자학 연구에서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황간이 찬술한 주자의 행장만으로는 그의 행적을 온전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송사(宋史)》에 기록된 주희 전기, 주희의 제자인 이방자(李方子)가 쓴 《연보(年譜)》, 이유무(李幼武)의 《황조도학명신외록(皇朝道學名臣外錄)》 등과 《연평답문(延平答問)》,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등 당시 수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참고하고 고증해 주희의 생애를 재구성했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주자행장집주》다. 주희 전기 자료의 전문가인 천룽제(陳榮捷, Wing-tsit Chan, 1901∼1994)는 이 책이 이황의 시대와 그 이후에도 가장 권위 있는 주희 관련 전기 자료라고 평가했으며, 일본 기문학파(崎門學派)의 강의록인 《주자행장강의(朱子行狀講義)》에서는 “이퇴계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주자의 학맥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이다. … 그는 조선 제일의 학자다. 퇴계가 주자학을 터득한 증거는 이 주해 작업에서 알 수 있다. … 퇴계의 주해는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바로서, 퇴계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작업이다”라고 평했다.
성리학자들의 교본
《주자 행장》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초학자들의 교재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주희의 인품과 기본 행적을 이해하는 훌륭한 자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중국에서는 《주자 행장》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나 주석 작업이 주목되는 바가 없는 반면, 한국과 일본에서는 《주자 행장》과 이황이 편집한 《주자행장집주》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개인적 독서나 집단적 강의 모임에서 자주 《주자 행장》을 강독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주자행장집주》를 강조했는데, 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齋)는 이 책을 최소 네 번은 강의했고, 그의 제자인 와카바야시 교사이(若林强齋)는 학당의 교과목에 포함시키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자 행장》의 번역은 1975년에 ‘강호석’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강호석 옮김, 《주자행장》, 을유문화사(을유문고 189)]. 이 책은 오역도 상당수 발견되고, 원문의 경우 고판본 자료를 영인해서 그대로 첨부했기 때문에 교감(校勘) 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옮긴이 장윤수 교수는 이러한 점을 보완했으며, 특히 이황의 《주자행장집주》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반영했고, 주희의 전기와 연보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물을 참고해 주해를 추가했다. 그리고 《주자 행장》에 수록된 각종 봉사(封事)류의 글은 원문을 발췌한 것이어서 문장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원문을 참고해 보완 글귀를 첨가함으로써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의 자의에 따라 원문 전체를 내용별로 분류하고 소제목을 붙였다. 본문 뒤에는 현대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는 송나라의 각종 관직명과 주희의 저작 목록, 연표, 주희 화상과 유묵 등도 부록으로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00자평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정신은 주희에서 시작해서 이황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조선의 정신을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다. 성리학의 거두 주희(朱熹)의 생애와 행실을 그 제자이자 사위인 황간이 기록하고, 퇴계 이황이 정리해 주석을 달았다. 주자학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자, 주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가장 권위 있고 깊이 있는 자료다. 옮긴이 장윤수 교수는 각종 판본을 대조해 교감하고, 이황의 주석을 번역했으며, 주희의 전기와 연보에 대한 각종 연구들을 참고해 주석을 달았다. 또 본문에서 발췌 인용한 상소문들은 전체 원문을 참고해 보완하고, 현대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는 송나라의 각종 관직명과 주희의 저작 목록, 연표, 주희 화상과 유묵 등도 부록으로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지은이
황간(黃榦, 1152∼1221)은 이름은 간(榦), 자는 직경(直卿)이며, 민현[閩縣, 지금의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 사람이다. 황간은 부친이 작고한 뒤에 주희의 제자인 유청지(劉清之, 1134∼1190)의 권유로 주희에게 수학했다. 그는 주희의 문하에서 학업을 펼친 후에 밤에도 자리를 깔고 눕지 않았으며,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면 의자에 잠시 앉아 새벽까지 그대로 지낼 때도 있었다. 주희는 주위 사람들에게 “황간은 뜻이 굳고 생각이 맑으니 그와 더불어 지내면 매우 유익하다”라고 칭찬했다. 후에 주희는 그 딸을 황간에게 시집보냈다.
영종(寧宗)이 즉위하자 주희는 황간에게 명해 표문(表文)을 올리게 했는데 이때 장사랑(將仕郎)에 보임되고, 감태주주무(監台州酒務)의 직책을 받았다. 주희는 자신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심의편(深衣篇)〉과 다른 저술들을 황간에게 전해 주면서, “나의 도를 부탁할 곳이 여기에 있으니 유감이 없구나”라고 하는 말을 직접 기록했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황간은 3년간 심상(心喪)의 예를 차렸다. 그 후에 감가흥부석문주고(監嘉興府石門酒庫)의 직책을 받았다. 오엽(吳獵)이 호북 지역을 다스릴 때에 황간을 불러 안무사주고(安撫司酒庫)에 임명했고, 강서제거상평(江西提擧常平) 조희역(趙希懌)은 황간을 불러 임천령(臨川令)으로 세웠다. 이후 안풍군(安豐軍), 한양군(漢陽軍), 안경부(安慶府) 등의 지방관을 맡았는데, 황간은 부임하는 곳마다 학교를 소중히 여기고 교육을 앞세웠다.
제치사(制置使) 이각(李珏)이 황간을 불러 참의관(參議官)으로 삼고자 했으나 황간은 그가 함께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주 지역을 맡으라는 명을 거듭 사양했다. 그 후 다시 안경(安慶) 지역을 맡으라는 명이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여산(廬山)에 들어가 주희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이번(李燔), 진복(陳宓)과 함께 옥연(玉淵)과 삼협(三峽)의 사이를 돌아보고 스승 주희가 남긴 발자취를 탐방했다. 그가 백록동서원에서 건괘와 곤괘 두 괘를 강의했을 때는 산남과 산북의 선비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재소(行在所)에 불려 가 시사 문제를 아뢰고 대리승(大理丞)의 직책을 제수받았으나 이를 받들지 않아 어사 이남(李楠)의 탄핵을 받았다.
황간이 처음 형호(荊湖)의 막부에 들어갔을 때 강호의 호걸들과 교유했는데, 당시 호걸들도 황간에게 기개와 큰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안경 지역에 와서 제치사 이각의 막부 일을 겸하게 되자 장회(長淮) 지역의 군민들이 마음속 깊이 복종했다. 이러한 소문이 나자 그 지역의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그를 더욱 시기하게 되었다. 더욱이 황간이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게 되면 변방의 실태를 그대로 보고해 황제가 저간의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될까 두려워해서 무리를 지어 방해했다. 황간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자 제자들이 날로 불어나 파(巴)·촉(蜀)·강(江)·회(淮)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예서》의 편찬과 저술에도 시간이 부족했지만, 밤에는 제자들과 함께 경의(經義)에 대한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근 사찰을 빌려 거처하며 의문 나는 점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는데, 마치 스승 주희가 살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 후에 조주(潮州) 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박주(亳州)의 명도궁(明道宮)을 주관하다가 이것마저 은퇴를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작고한 후에는 문인들의 요구로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술로는 《경해(經解)》와 《황면재선생문집(黃勉齋先生文集)》 등이 있다.
엮은이
이황(李滉, 1501∼1570)은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다. 일찍이 퇴계(退溪)에 집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이로써 자신의 호를 삼았으며, 그 뒤에 도산(陶山)에다 서당을 짓고 지냈기 때문에 도수(陶叟)라고도 했다.
이황은 출생한 지 1년도 못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글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 스스로 노력했다. 1528년(중종 23)에 진사 시험을 통과하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해 이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형조정랑(刑曹正郞),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548년 1월에는 외직으로 나가 단양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가 다시 풍기군수(豐基郡守)가 되었다. 1552년 여름에는 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와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부응교로 자리를 옮겼다가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고, 형조참의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면직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55년 봄에 사직을 청하고 해직되자 배를 세내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고 연달아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558년 가을에 면직을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황은 도성에 들어가 대사성에 임명되고 곧이어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황은 여러 번 사양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해(1559) 봄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니 임금이 공조참판을 그만두게 하고 대신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했다.
1565년 여름에 글을 올려 이마저도 해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해 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렇지만 같은 해 겨울에 임금이 다시 특지를 내려 그를 부르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했다. 1566년 1월에 이황은 병을 무릅쓰고 서울로 가는 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글을 올려 해직시켜 줄 것을 청했다. 서울로 가는 도중에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또다시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이황은 새로 내린 벼슬을 극력 사양하고 마침내 집에 돌아와 죄를 받기를 기다리니, 벼슬이 바뀌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567년(명종 22) 명종이 승하하고 뒤를 이은 선조가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했는데, 이황이 사양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서울로 빨리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상소를 올려 이를 간곡하게 사양했다.
1568년(선조 1) 1월에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어 이를 사양하자 이번에는 또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이해 7월에 이황은 임금께 나아가 직책을 사양한 뒤 그 대신에 새 임금을 위해 치자(治者)의 도리와 당면 시무(時務)를 건의한 〈6조소(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다. 그 후 다시 대제학과 이조판서,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모두 극력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9년 네 차례나 차자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므로, 임금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직접 만나 위로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잘 보호해 주도록 역(驛)에 명했다. 이달에 이황은 집에 도착한 다음 글을 올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곧 벼슬에서 면해 줄 것을 청했다. 병환이 위중해지자 이황은 아들 준(寯)에게 예장(禮葬)을 사양하도록 명했는데, 아들 준은 가르침을 받들어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두 번이나 상소해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묘도(墓道)의 표(表)는 유계(遺戒)에 따라 이황이 지은 명문을 그대로 썼다. 이황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서 으뜸임을 당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후대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반드시 느끼고 마음에 들어맞는 것이 있을 것인데, 명문에서 서술한 것을 통해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
장윤수(張閏洙)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동양 철학(유가 철학)을 전공해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시베이대학 객좌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동양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학문적인 주요 관심 분야는 송대(宋代) 신유학, 영남학파의 성리 사상, 동양 교육 사상 등이다. 저서에는 《도, 길을 가며 길을 묻다》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문화 정신》 등 다수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퇴계 철학에 있어서 이(理)의 능동성 이론과 그 연원〉, 〈강안학(江岸學)의 학문 정체성과 몇 가지 문제점 검토〉 등이 있다. 대한철학회 운제철학상(2019), 대동철학회 학술상(2021), 중국출판협회 번역서 우수학술상(2020)을 수상했다.
이메일 : ysjang@dnue.ac.kr
차례
1. 출신 배경과 어릴 적 학업
2. 초기 관직 생활과 효종에게 올린 첫 상소문
3. 조정에 나아가 효종의 자문에 응함
4. 관직 임명과 거듭된 사퇴
5. 남강(南康)에서 선정을 베풂
6. 백성들을 위해 상소를 올림
7. 궁중에서 효종의 자문에 응함
8. 목민관으로서 애민(愛民) 정치를 실시함
9. 무신년(1188) 연화전(延和殿)에서 효종에게 올린 주차(奏箚)
10. 무신년(1188)에 효종에게 올린 봉사(封事)
11. 이단의 학문을 경계하고 백성의 교육에 힘씀
12. 입대(入對)한 후에 영종의 깊은 신임을 얻음
13. 영종에게 강의를 함
14. 조정에서 예법을 논쟁함
15. 관직에서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작고함
16. 학문적 탄압과 복권
17. 나라 사랑과 정치적 처신
18. 스승 : 학문 연원
19.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지경(持敬)의 공부
20. 도학(道學)의 실천
21. 평상시의 행동과 인품
22. 경전 연구
23. 성리 사상 연구와 도학 선양
24. 강학 방법과 학문적 우월함
25. 마지막 유언
26. 남긴 저술
27. 유족
28. 도통(道統)의 계승
29. 부록 : 《행장》 저술과 관련한 몇 가지 변명
부록
본문에 등장하는 관직명
참고 문헌
주희의 저작 목록
주희의 주요 연표
주희 화상(畫像)
주희의 유묵(遺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선생은 건염 4년(1130) 9월 15일 정오 무렵에 남검주 우계의 부모가 거처하던 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행동이 장중했다. 겨우 말을 할 무렵에 아버지 위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것이 하늘이다”라고 하자,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위재는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을 배웠는데, 한 번 본 후에 책을 덮어 놓고는 그 위에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썼다. 언젠가 여러 아이들과 함께 모래 위에서 놀게 되었다. 선생은 혼자 단정하게 앉아 손가락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팔괘였다. 조금 더 커서는 성현의 학문에 뜻을 돈독하게 두었으며 과거 공부에는 처음부터 마음을 두지 않았다.
〈1. 출신 배경과 어릴 적 학업〉에서
순희 5년(1178, 48세)에는 발견남강군사(發遣南康軍事)에 임명되었으나 네 번을 사퇴한 끝에 비로소 임지로 갔다. 선생은 동안(同安)에서 돌아와 봉사직으로 집에서 거처한 지가 거의 20년이 되었는데, 비록 형편이 어렵고 빈곤했지만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수양을 많이 쌓아 이치가 밝아지고 의리가 정밀해져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드러나는 것이 더욱 거침이 없었다. 군(郡)에 부임해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백성 사랑하기를 마치 자신을 근심하는 것같이 했으며, 이로운 일을 진작하고 해로운 일을 제거했는데, 오직 힘이 닿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속읍(屬邑)인 성자(星子)는 토지가 척박하고 세금이 과중해 백성의 세금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모두 대여섯 번이나 올렸다. 그해에 비가 오지 않아 구황책을 강구했고, 무릇 조정에 청원할 때는 하지 않은 말이 없었다. 관물(官物)의 피해를 살펴 조세를 면해 주거나 탕감하거나 분납하거나 연장해 주었고, 추묘하세(秋苗夏稅)·목탄월장(木炭月樁)·경총제전(經總制錢) 등은 각각 그 고을의 항목에 따라서 조목조목 상소를 올렸다. 간혹 서너 번까지 올리기도 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5. 남강(南康)에서 선정을 베풂〉에서
선생의 학문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窮理] 앎을 지극히 하며[致知], 자신을 돌이켜 반성함으로써[反躬] 실천하는 것이다. 거경(居敬)이란 성학(聖學)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원리다. 그래서 선생은 앎을 지극히 하되 경(敬)하지 못하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분란이 일어나 의리의 귀결처를 살피지 못할 것이며, 실천궁행하면서도 경(敬)하지 못하면 마음이 태만하고 방자해져서 의리의 실상을 지극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경을 지키는 방법[持敬]으로는 주일(主一), 즉 하나를 위주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선생은 잠언(箴言)을 지어 스스로 경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써 두기까지 했으며, 《소학》과 《대학》이 모두 여기에 근본을 둔다고 여겼다.
〈19.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지경(持敬)의 공부〉에서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또한 어찌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 일반적인 체계에 따라서 논의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 중에는, 임금께 아뢰는 선생의 상소가 지나치게 곧고 또한 다른 사람의 과실을 기술함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신하가 임금에게 어려운 일 곧 인정(仁政)을 하도록 권면하고, 임금에게 선언(善言) 곧 인의(仁義)의 도리를 진술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다. 임금이 앞에서 용인한 것을 신하가 도리어 뒤에서 숨기려 한다거나, 선생이 당시에 과감하게 말한 것을 후세 학자들이 도리어 감추려 하면 되겠는가? 사람들의 과실을 판결서에 기록하거나 상주문(上奏文)에 진술한 것은 천하 후세 사람들이 모두 다 알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을 덮어 버리려 한다면 옳다고 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상주한 소장의 글을 기술한 것이 지나치게 번잡하고, 청원한 사실에 대한 기사를 그토록 세밀하게 언급한 것은 행장의 체제에 맞지 않는다고 비평했다. 옛사람 중에 임금이 도를 행하게 되어 사실을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면 상소문의 내용은 기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관직에 나아갔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했고, 알 만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 언론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곧 선생의 정치 규범의 바탕이었으니, 그 언론과 행실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29. 부록 : 《행장》 저술과 관련한 몇 가지 변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