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춘향전》은 어느 한 개인에 의해 단시일에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다. 당초에 어떤 작가가 쓰긴 했으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풍토 속에서 전사되어 가던 도중 원작자는 점차 잊혀지고, 원작의 내용에 많은 사람들의 창의적인 내용이 덧붙었다. 이처럼 원본에 층이 가해지고 다시 거기에 층이 더해져 가는 현상을 ‘적층현상’이라 한다면, 《춘향전》은 수백 년간 수많은 사람의 입심과 몸짓이 더해져 만들어진 적층문학의 하나인 셈이다. 오늘날 《춘향전》의 원본은 이미 사라졌지만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는 국문소설뿐만이 아니라 한문으로도 번역되며 3백 종이 넘는 이본을 파생시켰다.
이 책은 이명선(李明善)이 소장했던 고사본(古寫本) 《춘향전》, ‘이고본 춘향전’이라 통칭하는 이본을 저본으로 했다. 수많은 이본 중에서도 긴 편에 속하고 심한 비속어와 성적인 대목들이 들어 있는가 하면, 전편에 걸쳐 해학과 풍자가 번뜩이는 대표 이본이다. 이명선본 《춘향전》은 잡지 《문장》(1939~1941)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상허 이태준과 《문장》의 편집진들은 “우리 고전 중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이본이 많은 작품”으로 《춘향전》을 호명하고, 그것의 대표 이본을 차례로 소개하는 ‘춘향전집(春香全集)’을 기획했는데, 이 기획의 가장 첫머리에 놓였던 것이 바로 이명선본 《춘향전》이다.
이태준과 《문장》이 이명선본 《춘향전》을 가장 먼저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1세대 국문학자 도남 조윤제는 〈춘향전 이본고〉(1939)라는 글에서 《춘향전》의 또 다른 대표 이본인 완판 《열녀춘향수절가》와 이명선본을 대비하며, 전자가 시민적 문학이라면 후자는 농민적 문학이라 규정했다. 즉, 이명선본 《춘향전》은 완판이 결여하고 있는 향토미를 간직한 ‘순수한 춘향전’이라 본 것이다. 이태준과 《문장》의 편집진은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춘향전’인 이명선본으로 기획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다.
옮긴이 조희웅 교수는 50년도 더 지난 1972년 10월 13일 제18회 고전문학연구회 발표 석상에서 이명선본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번역과 주석 작업에 돌입해 매우 고심했는데, 쉽게 풀리지 않는 춘향이의 옥중 해몽 대목을 풀기 위해 대한극장 옆에 있던 당시 이름난 복술가를 찾아가 해결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차례 이사를 하는 중에도 이명선본의 원고 뭉치를 끌고 다녔고, 2008년 출판된 영인본을 바탕으로 수정 증보하게 됐다. 옮긴이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명선본 《춘향전》과 함께한 셈이다.
원문을 배려해 전문적으로 번역했고, 간단한 어휘부터 중국의 고사와 인물까지 2800개가 넘는 방대한 주석을 붙였다.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원문을 함께 수록했으며, 본문에 미처 수록하지 못한 출전의 원문은 ‘보주(補註)’로 정리했다. 다른 이본과의 비교를 통해 이명선본 《춘향전》만의 개성과 위상을 알 수 있는 전문적인 해설을 수록했다.
200자평
우리 고전소설의 대표 작품인 ‘춘향전’은 어느 한 개인이 단시일에 완성한 것이 아닌, 수백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입심과 몸짓이 더해져 만들어진 ‘적층문학’이다. 오랜 세월 죽순처럼 생겨난 이본들은 3백 종이 넘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본은 무엇일까? 1940년, “우리 고전 중에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춘향전’을 호명했던 상허 이태준과 《문장》(1939∼1941)의 편집진은 춘향전의 대표 이본을 소개하는 ‘춘향전집(春香全集)’ 기획의 첫 머리에 이 책의 저본이 된 이명선 소장 고사본(古寫本) 《춘향전》을 놓았다. 다른 이본들이 잃어버린 향토미를 간직한 ‘순수한 춘향전’으로 이 판본을 꼽은 것이다. 1972년 이명선본 《춘향전》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한 조희웅 교수가 번역하고 2800개가 넘는 정밀한 주석을 붙였다.
옮긴이
조희웅은 194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양대학교 전임강사와 국민대학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일본 규슈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학장과 대학원장으로 활동했으며, 한국구비문학회 회장과 한국고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구비문학 개설》(공저,1971), 《한국구비문학대계》[서울 도봉구 편(1980), 경기 의정부 남양주군 편(1981), 경기 안성 군 편(1982), 경기 용인군 편(1984)], 《조선 후기 문헌설화의연구》(1980), 《설화학 강요》(1989), 《이야기문학의 모꼬지》(1995), 《한국설화의 유형》(1996), 《고전소설 이본목록》(1999), 《고전소설 작품연구 총람》(2000), 《고전소설문헌정보》(2000), 《Korean Folktales》(2001), 《경기북부구전자료집 1》(2001),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 1/2》(2002), 《편옥기우기》(공저,2002), 《영남 구전자료집》(8책, 공편, 2003), 《영남 구전민요 자료집》(3책, 공편,2005), 《고전소설 연구보정》(2책, 2006), 《이야기문학 실타래》(2008), 《이야기문학 가을갈이》(2008), 《경판 조웅전》(2008), 《이야기문학 징검돌》(2009), 《완판 조웅전》(2009), 《이야기 망태기》(2책, 2011), 《한국 고전소설 등장인물 사전》(25책,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한국 고전소설사 큰사전》(74책, 지식을만드는지식, 2017), 《소도시 기행》(공저, 2020) 등이 있다. 〈원생몽유록 작자 재고〉(1963) 이후 현재까지 약 백여 편의 논문이 있다. 현재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다.
차례
옮긴이 서문
이 古寫本에 對하야
광한루(廣寒樓)
상사일념(相思一念)
초야(初夜)
이별(離別)
신관사또(新官使道)
핍박(逼迫)
암행어사(暗行御史)
옥중해몽(獄中解夢)
재회(再回)
어사출또(御史出道)
원문
보주
이고본 춘향전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방자 놈이 춘향이를 부르러 건너간다. 진허리 참나무 뚝 꺾어 거꾸로 짚고 출림풍종 맹호같이 바삐 뛰어 건너가서, 눈 위에다 손을 얹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러,
“야, 춘향아 말 듣거라, 야단났다. 야단이 났다.”
춘향이가 깜짝 놀라 추천 줄에서 뛰어내려와 눈 흘기며 욕을 하되,
“애고, 망칙해라. 제미씹 개씹으로 열두 다섯 번 나온 녀석. 눈깔은 어름에 자빠진 경풍한 쇠 눈깔같이 최 생원의 호패 구멍같이 똑 뚫어진 녀석이, 대가리는 어리동산의 문 달래 따먹던 덩덕새대가리 같은 녀석이, 소리는 생고자 새끼같이 몹시 질러 하마터면 애보가 떨어질 뻔하였지.”
방자 놈 한참 듣다가 어이없어,
“야, 이 계집애 년아. 입술이 부드러워 욕은 잘한다마는 내 말을 들어 보아라. 모화관 처녀가 돼지 타고 기추 쏘는 것도 보고, 소가 발톱에 봉선화 들이고 장에 온 것도 보고, 고양이가 성적하고 시집가는 것도 보고, 쥐구멍에 홍살문 세우고 초헌이 들락날락하는 것도 보고, 암캐 월우하여 서답 찬 것도 보았으되, 어린 아이년이 애보 있단 말은 너한테 처음 듣겠다.”
– 본문 3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