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장모
김은희가 옮긴 유리 나기빈(Юрий М. Нагибин)의 ≪금발의 장모(Моя золотая тёща)≫
소련에서 살았던 70년
러시아 작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기빈처럼 노골적이고 고백적으로 자신의 치명적 과거를 작품 속에 쏟은 작가는 없다. 왜 그랬을까? 솔제니친이 대답한다. 이 작품이 “구소련 시대에서 70년을 산 나기빈의 삶과 시대상”을 가장 잘 나타냈다고. 스탈린 시대는 부끄러움을 잊었던 것일까?
“추워.” 그녀가 말했다. “옷 입어도 돼?”
“잠깐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그녀의 눈과 입술에서부터 무릎까지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가 다시 나에게 폭풍처럼 밀려왔을 때 그녀는 말했다.
“이러지 마. 여기서는 어차피 안 될 거야. 우리 장소를 찾아보자.”
“지금이요?”
“아이, 지금 어디서? 이미 늦었잖아. 우리 집 사람들은 오래전에 잠들었을 거야. 옷 입어도 돼?”
그녀가 마치 내가 그녀에 대한 어떤 권리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나의 허락을 구했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 벤치에서의 나의 고백 이후에는 이미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높은 음을 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나는 그녀가 원피스 단추 잠그는 것을 도왔다. 아주 가까이, 거리 초입에 우리 쪽으로 등을 보이고 푸시킨 동상이 서 있었다. 아마 그는 유쾌한 마음으로 우리를 승인했을 것이다. 옷을 입은 후에 우리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부를 건가?” 그녀가 물었다. 그리고 마음이 그녀의 얼굴에 안주해 있었고, 마치 새롭게 얼굴을 다시 구성한 것 같았다. 눈썹 위쪽 둥그런 부분은 윤곽이 더 뚜렷해졌으며, 눈구멍이 약간 더 깊어졌고, 광대뼈가 올라왔으며, 턱은 더 부드럽게 둥글어졌다.
“달링이오.” 나는 답했다.
“우리가 둘만 있을 때는 나에게 ‘너’라고 반말로 하면 안 될까?”
“만약 우리가 친밀한 관계가 된다면요.”
“그렇다면 우리는 친밀하지가 않다는 말이야? 어떻게 더 가까워진단 말이야.”
“당신도 알잖아요. 그렇게 될까요?”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금발의 장모≫, 유리 나기빈 지음, 김은희 옮김, 235~237쪽
연인의 데이트 장면인가? 뭔가 어색한 이유는?
두 남녀는 사위와 장모 관계다. 어쩌다가 사위가 장모에게 연정을 품었고 사랑이 불타올라 한겨울 인적 드문 모스크바 거리에서 밀애를 나눈다.
놀라운 일이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나?
러시아 문학 전통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투르게네프, 쿠프린, 부닌을 거쳐 내려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유리 나기빈이 사랑의 테마를 독특한 소재와 형식 속에서 발전시킨다. ≪금발의 장모≫는 1994년 나기빈 사후에야 발표된다. 작가 본인도 생전에 발표를 꺼렸던 것 같다. 너무 파격적인 소재라 발표 당시에도 큰 관심과 격론을 불렀다. 서술 측면에서도 과감한 성 묘사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실제로 나기빈이 자신의 세 번째 아내 어머니와 나눴던 사랑을 소재로 한 자전 소설이다.
이 작품 발표 이후 나기빈은 어떤 대우를 받았나?
‘러시아의 헨리 밀러’로 불리기도 했고,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와 비교되면서 ‘반(反)롤리타’로 ≪금발의 장모≫를 분석하려는 시도도 등장했다. 솔제니친은 “나기빈이 평생 쓴 작품 중 ≪금발의 장모≫가 가장 흥미 있다. 구소련 시대에서 70년을 산 나기빈의 삶과 시대상이 잘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금발의 장모≫는 사랑의 노래다.
금지된 사랑은 흔한 소재 아닌가? 이 작품은 뭐가 달랐나?
러시아 작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기빈처럼 노골적이고 고백적으로 자신의 치명적 과거를 작품 속에 쏟은 작가는 없다.
이 작품의 소재는 사랑인가, 성인가, 아니면 소련인가?
주인공 크림의 장인은 구소련 시절에 유명했던 자동차 공장 사장이다. 스탈린 집권기였는데, 공장 사장이라는 직책은 퍽 높은 자리다. 즉 스탈린 시대 고위층들의 생활상, 전후 소련의 시대상을 표현했다.
크림은 어쩌다 장모와 그렇게 되었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주인공 크림은 부상당해 귀향한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생긴 상태였다. 결국 아내와 헤어졌다. 그는 예전에 스쳐 지나간 인연일 뿐이었던 갈랴라는 네 살배기 아들을 둔 이혼녀와 만나게 된다. 갈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때 크림은 갈랴의 약혼자 자격으로 초대받아 간 여름 별장에서 처음으로 장모가 될 여인을 보고 운명처럼 그녀에게 빠져든다.
장모의 무엇이 사위를 끌어들이나?
갈랴의 어머니인 타티야나 알렉세예브나 즈뱌긴체바는 매혹적이고 알 수 없는 매력을 풍기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이다. 작품 속 묘사에 따르면 “금빛을 발하면서, 자신 주위에 어떤 광채를 만들어 내고” “꽤 큰 키에, 러시아 미인들이 그러하듯이 통통했으며, 금발에, 회청색 눈에, 약간은 사자코에, 선홍색의 건강한 입술을 가졌다”고 한다. 마치 “다른 우주계에 속해” 있는 여인 같았다고 한다.
장모를 사랑한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
크림은 결국 갈랴와 결혼한 후 처갓집에서 살면서 장모를 더욱 사랑하고 그녀를 탐하는 동물적 본능 속으로 빠져든다. 구소련 시대의 최상류층인 처갓집과 그 주변 사람들을 가까이 만나면서 그들의 이중적 윤리관과 관료주의, 부패상, 성적 문란을 목격한다.
스탈린 시대 상류층의 섹스 윤리는 어떤 수준이었나?
장인 즈뱌긴체프는 타티야나와는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주위 사람들을 불러 놓고 내연녀와 결혼식까지 올린다.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공공연하게 외도하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잦은 술자리와 파티를 즐긴다. 이 작품은 스탈린 측근의 일화를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장모와 사랑하다 결국 어떻게 되나?
작품은 사위가 장모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마침내 그렇게 갈망하던 장모와 육체관계를 맺지만, 장모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남편 즈뱌긴체프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포기한다. 장모와 정사를 갖는 현장을 장인에게 들킨 크림이 도망치면서 그들의 인연도, 작품도 결말을 맺는다.
나이와 관계를 초월한 사랑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자신이 경험한 특이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 인간 본성의 문제에 천착했다.
나기빈과 그의 본성은 어떤 것인가?
나기빈이 사랑에 집착한 이유는 결혼을 여섯 번이나 한 작가 본인의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도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결국 사람을 움직이고 살아 있게 만들고 자신을 발현시키는 것은 사랑이다’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작가의 출생 배경은 어떤 것인가?
1920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적백내전 때였다. 아버지 키릴 알렉산드로비치 나기빈은 쿠르스카야 현의 봉기에서 백군으로 참전해 총살당했다. 어머니 크세니아 알렉세예브나는 남편 친구였던 마르크 레벤탈과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나기빈을 그의 아들로 입적했다. 나기빈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떻게 문학에 입문한 것인가?
나기빈의 어머니는 1928년 작가 야코프 리카체프와 재혼한다. 리카체프는 나기빈의 첫 번째 문학 선생이다. 리카체프의 권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영향 아래 독서 범위가 정해지고, 마르셀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 레스코프, 부닌, 플라토노프 등의 작품들을 만난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기빈은 어머니의 권유로 모스크바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흥미가 없어서 중도 포기하고 소련국립영화대학에 재입학했다. 1940년 첫 번째 단편 <이중의 실수>로 문단에 등단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에 징병되어 볼호프 전선의 정치국에서 복무한다. 나기빈은 1942년 ‘문학 지도자’로서 보로네시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소비에트 작가동맹에 가입했다. 전쟁 중에 ≪노동≫지의 종군기자로 활동했고, 전선 경험은 ≪전선에서 온 사람≫ 같은 단편집의 소재가 되었다. 전선에서 두 번 부상당했다. 전쟁이 끝나자 창작에만 몰두한다.
나기빈의 작품 세계는 무엇인가?
단편소설을 주로 썼던 그의 작품 세계는 ‘전쟁 서클’, ‘사냥 서클’, ‘자전적 서클’, ‘역사적 전기 서클’로 나눌 수 있다. ‘전쟁 서클’은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이른다. 전쟁 중 발표된 단편들에서는 적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군인 얘기가 주로 나왔다. 전쟁 후의 작품들에서는 전쟁터 속 인물의 심리적 깊이와 성격 묘사 등이 두드러진다.
‘사냥 서클’은 1956년에서 1964년까지 나타난 경향이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1인칭 화자,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사냥꾼 아나톨리 이바노비치가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섬세한 관찰력과 유려한 문체를 드러낸다. 작품 속에 반영된 자연은 사람에게 선(善), 양심, 현명함, 근면성 등을 가르쳐 주며 사람을 양육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1950~1960년대에 나타난 ‘자전적 서클’은 농촌 산문과 서정 산문의 영향을 받았다. 자전적 주인공인 세료자 라키틴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가 속했던 세대가 어떤 기원 위에서 형성되었는지의 문제에 천착한다. 자전적 서클의 작품들은 모스크바의 모습을 거의 백과사전식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테마와 소재 면에서 볼 때 거의 나기빈 생의 마지막 작품들에까지 계속해서 확장되고 보충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역사적 전기 서클’에서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사의 ‘모델’들인 아바쿰, 트레티야코프, 푸시킨, 레르몬토프, 페트, 레스코프, 차이콥스키, 델리비크의 삶을, 주요 단면으로 포착해 예술로 재현했다. 나기빈은 예술가들의 정신세계를 재현하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주관적 관심 분야와 묘사 대상에 대한 제한된 지식 때문에 전문적인 전기 작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서클의 기본 과제는 예술가의 개인성을 통해 그의 창작을 이해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은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20세기 러시아문학사과에서 러시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출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