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창강 김택영은 조선 5백 년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셋으로 퇴계와 율곡의 도학, 이순신의 용병술과 더불어 연암의 문장을 꼽았다. 운양 김윤식은 고전의 문인 가운데 오직 연암만이 성리학을 모방하는 폐단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한다. 오늘날의 인문학자들도 연암을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아 독일에 괴테,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암의 문장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문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1792년, 정조는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을 지목했다. 이어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전해들은 연암은 낙척하고 불우해 “글로써 놀이를 삼았다(以文爲戱)”고 자신의 잘못을 자복했으나 끝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지는 않았다.
이른바 ‘연암체(燕巖體)’라 불리는 그의 문장은 어떤 모양인가? 억지로 점잖은 체하는 고상한 글을 거부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연암 박지원. 틀에 박힌 표현과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를 지향했던 연암의 문장은 그가 지은 소설에서 더 빛이 난다. 연암의 작품 가운데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린 7편과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린 2편, 《연상각선본(烟湘閣選本)》에 실린 1편을 번역해 소개한다.
유사한 구성의 번역서가 이미 많이 나와 있으나 연암의 문장이 품고 있는 고유한 빛깔을 버리지 않은 것이 이 책의 차별점이다. 《연암 산문의 멋》(현암사, 2022)·《열하일기 첫걸음》(돌베개, 2020)·《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돌베개, 2013)을 저술한 박수밀 교수가 연암의 간결한 문장과 맛깔스러운 문체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원문 그대로 충실히 번역했다.
200자평
연암의 문장은 퇴계와 율곡의 도학, 이순신의 용병술과 함께 조선의 3대 보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1792년, 정조는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연암을 지목하고, 이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칠 것을 명령했다. 연암은 “낙척하고 불우해 글로써 놀이를 삼았다”며 자신의 잘못을 자복했으나 끝내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았다. 틀에 박힌 표현과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를 지향했던 연암 박지원. 사람들은 그의 문장을 두고 ‘연암체(燕巖體)’라 부른다.
지은이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실학자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
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반당 자격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고희연을 치르는 바람에 조선 사신 역사상 처음으로 열하에 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여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지향했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아들이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는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50여 편이 전한다.
옮긴이
박수밀은 작은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고전의 지혜를 담백하면서 맑은 언어로 풀어내는 고전학자다. 옛사람들의 글에 나타난 심미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미시적 관찰과 거시적 조망의 균형 감각을 놓치지 않으면서 문학과 교육·역사·철학을 아우르는 시좌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박지원의 합리적 이성, 이덕무의 온화한 성품, 박제가의 뜨거운 이상을 배우려 한다. 고전의 인문 정신과 글쓰기, 생태 정신과 21세기 생태 사상, 동아시아 교류사를 공부하고 있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을 오랫동안 탐구해 오고 있으며, 그 결실로 《연암 산문의 멋》·《열하일기 첫걸음》·《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을 저술했다. 고전을 지금−여기와 소통하려는 노력으로 《오래 흐르면 반드시 바다에 이른다》, 《오우아 : 나는 나를 벗 삼는다》, 《청춘보다 푸르게, 삶보다 짙게》, 《탐독가들》, 《리더의 말공부》, 《고전 필사》,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등을 썼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과학기술 글쓰기》(공저)를 저술했으며,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살아있는 한자교과서》(공저), 《기적의 한자학습》(공저), 《기적의 명문장 따라 쓰기》, 《해결 초등 글쓰기》 등을 썼다. 역서로는 《정유각집》(공저), 《연암 산문집》 등이 있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차례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우상전(虞裳傳)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민 노인이 말했다.
“그런 조그만 벌레는 걱정할 거 없네. 내가 보니 종로에 길을 가득 메운 것들이 모두 황충이네. 키가 모두 일곱 자쯤 되는 데다 머리는 새까맣고 눈은 반짝하지. 아가리는 커서 주먹이 들어갈 만한데 시끌시끌 떠들며 꾸부정한 모습으로 떼 지어 다니네. 곡식만 축내기로는 이것들만 한 것이 없더군. 내가 잡고 싶은데 큰 바가지가 없는 게 한이라네.”
− 〈민옹전(閔翁傳)〉 중에서
“그 선비, 역겹구나.”
(…)
네놈들이 이(理)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때, 툭하면 하늘을 들먹이지만 하늘이 명령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든 사람이든 만물의 하나일 뿐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르는 어짊으로 논하자면, 범과 메뚜기, 누에와 벌, 개미는 사람과 함께 길러지는 것이니, 서로 어그러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선악으로써 판별한다면, 벌과 개미의 집을 공공연히 빼앗아 가는 놈이야말로 천지의 큰 도둑이 아니겠느냐?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제 마음대로 훔쳐 가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를 해치는 큰 도적이 아니겠느냐?
− 〈호질(虎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