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요긴한 볼거리’라는 뜻의 《요람(要覽)》은 소설과 서(序), 역사기록물, 소지(所志), 상언(上言)과 제사(題辭)까지 다양한 문체의 글을 수록하고 있는 잡(雜)한 텍스트다. 서리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서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적인 의도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문체의 글들을 담고 있다.
〈최치원전(崔致遠傳)〉과 〈이화실전(李花實傳)〉은 〈지하국대적퇴치〉 설화를 근간으로 한 소설이다. 이 설화를 모티프로 한 소설들은 대개 적대자에게 납치된 여주인공이 자신을 구한 남주인공과 결합하는 양상인데, 〈이화실전(李花實傳)〉은 그렇지 않다. 아내가 남편을 배신했다가 결국 징계되고 아내의 시비가 충절을 지키며 주인공을 도움으로써 아내의 위치로 승격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가문의 후손이 음탕한 모습을 보이고 그에 비해 보잘것없는 시비가 충절을 지킴으로써 신분의 열세를 윤리적 우위로 극복하는 양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신분제 사회가 변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한편, 여전히 정절과 충절의 윤리 의식이 지속됨을 보여 준다. 같은 설화를 토대로 했으나 각각 새로운 시대의 단면을 형상화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앞의 두 소설과 함께 실용문이 아닌 ‘문학’이라는 점에서 〈동군을 보내는 글(餞東君序)〉은 《요람》의 다른 글들과 대별된다. 이 작품은 임제의 문집에 있는 짧은 글로, 봄을 ‘동군(東君)’으로 의인화해 그 덕을 칭송하고 전송하는 내용이다.
〈박응교직간록(朴應敎直諫錄)〉과 〈남한일기(南漢日記)〉는 역사기록물이다. 〈박응교직간록〉은 인형왕후의 폐위가 옳지 않다고 상소를 올린 박태보가 모진 문초를 당하고 유배 가다가 죽게 되는 일련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박태보의 사건은 《박태보전》과 《박태보실기》 등 소설로도 만들어져 읽힌 작품인데, 〈박응교직간록〉 역시 대화체가 많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남한일기〉는 작자를 알 수 없는, 병자호란의 경위를 간략하게 기록한 일기다. 호란이 일어난 병자년(1636) 12월 12일부터 다음 해 1월 2일까지 남한산성의 긴박한 상황을 속도감 있게 전달한다.
한편 《요람》에는 여러 편의 소지류가 실려 있다. 소지(所志)란 관청에 올리는 소장이나 청원서, 진정서 등을 말한다. 《요람》의 소지류 작품들은 특별히 동물들이 인간에게 하소연하는 형식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원고의 고발과 피고의 답변 그리고 인간의 판결로 이루어졌는데, 동물의 생태와 관련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한다. 개와 고양이, 까치와 까마귀가 서로를 고발하는가 하면, 곡식을 도둑맞은 다람쥐가 도둑질을 한 쥐와 그를 제지하지 않은 포도청의 고양이를 처벌해 달라 탄원하기도 한다. 평생 일만 하며 인간에게 충성을 바쳤는데, 고기를 먹으려고 도살까지 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는 소의 하소연도 있다.
마지막 유형은 상언과 제사다. 상언(上言)은 임금에게 사정을 하소연하는 글이고, 제사(題辭)는 판결문의 일종이다. 〈임자강 산송에 대한 상언〉은 묘지와 관련해 소송을 제기한다. 가문의 선영에 권력을 이용해 모친을 장례한 일이 있으니, 이장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경문의 부친 기의 전사에 대한 상언〉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다가 전사한 조상에게 정려와 포상을 청한다고 경문의 손자가 올린 글이다. 〈이순필·순정 형제의 송사를 해결함〉은 토지를 두고 다투는 이순필과 이순정 형제의 소송을 화해시켜 해결한 판결 내용을 담고 있다.
실려 있는 작품들의 성격도, 문체도 다양해 《요람(要覽)》은 무엇이라 특징짓기 어려운 잡(雜)한 텍스트다. 이들 작품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언어 다음 가는 인간의 특징이다. 우리의 삶은 아주 빈번하게 ‘이야기’와 관련된다. 소설뿐만 아니라 무언가의 역사를 기록할 때, 누군가를 고발할 때, 그에 대해 자신을 변호할 때, 자신의 사정을 글로 써 하소연할 때,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요람(要覽)》은 우리의 삶이 다른 무엇보다 수많은 서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200자평
‘요긴한 볼거리’라는 뜻의 《요람(要覽)》은 소설과 서(序), 역사기록물, 소지(所志), 상언(上言)과 제사(題辭)까지 다양한 문체의 글을 수록하고 있는 잡(雜)한 텍스트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들 모두가 ‘이야기’라는 점이다. 비단 소설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할 때, 누군가를 고발할 때, 자신을 변호할 때, 자신의 사정을 글로 써 하소연할 때,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요람(要覽)》은 우리의 삶이 수많은 서사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옮긴이
이대형은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이다. 고전문학 특히 고전소설에 관한 연구를 했고 최근에는 승려 문집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 《금오신화 연구》, 공저로 《옛편지 낱말사전》, 역서로 《심생전·운영전》, 《다송문고》 등이 있다.
차례
최치원전
박응교직간록
남한일기
동물들의 송사
– 고양이와 개
– 까치와 까마귀
– 다람쥐와 쥐, 고양이
– 소의 하소연
임자강의 산송 상언
동군을 보내는 글
이순필·순정 형제의 송사를 해결함
경문의 부친 경기의 전사에 대한 상언
이화실전
원문
崔致遠傳
朴應敎直諫錄
南漢日記
婢猫今所志
奴狗同原情
枝頭鵲諫治等狀
加魔恠 年一百六十五
栗木里接鼯山所志
鼠大盜供辭
捕盜監考猫同 年一萬
農牛等狀
任自剛山訟上言
餞東君序
解李順弼·順貞兄弟之訟
慶門父豈戰亡上言
李生傳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저는 가축이기에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나, 마음은 심히 밝아서 사람의 뜻을 잘 헤아려 부르면 가고 꾸짖으면 물러납니다. 더욱이 주인 섬기는 도리를 알아서 집을 지키는 책무를 자못 부지런히 하옵더니, 근래 흉측한 도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주인집의 울타리는 심히 엉성해 만약 도적맞는 환란이 생기면 책임이 저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려하고 또 걱정하는 마음을 더해 밤마다 울타리 밑에 앉아서 계속해서 사방을 돌아보아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입으로는 계속해서 짖는 고통이 해가 뜰 때야 그칠 수 있사옵니다.
(…)
그러나 같은 노비인 묘금(猫今)은 소임이 쥐 잡는 일 하나에 불과하며 몸은 둔하고 마음은 게을러서 자는 것을 즐겨 습관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쥐 도적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무리를 이루어 반찬을 훔치고 옷을 깨물어 찢으며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어도 심상하게 볼 뿐만 아니라, 고기반찬이 있는 곳을 미리 기억해 두었다가 틈을 타서 도리어 스스로 훔쳐 먹으니, ‘도둑으로 도둑을 지킨다’는 것이 이를 이르는 것인 줄 아룁니다. 때때로 혹 병든 쥐를 운 좋게 잡으면 던지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가지고 노는 것으로 일을 삼아 조금도 책임감이 없으니 마땅히 일에 태만한 죄벌을 받아야 합니다.
주인께서는 이러한 정상을 알지 못하시어 꾸짖음을 내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은혜로 대우하시어 좋은 밥에 맛있는 음식을 계속해서 먹이고, 비단 방석에 누울 수 있도록 하옵신 때, 저는 마루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혼자 제 이름을 부르며 자책했습니다.
− 〈노비 개똥의 원정(奴狗同原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