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종합병원 병원장 베른하르디 교수는 낙태 수술 도중 과다 투약으로 환자가 섬망 증세를 보이자 종부 성사를 위해 찾아온 신부를 돌려보낸다.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차 있는 환자에게서 종부 성사로 사망 선고를 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환자는 병실 밖에서 들려오는 베른하르디 교수와 신부의 대화를 듣고 절망해 어찌해 볼 틈도 없이 사망해 버린다.
이 스캔들은 엉뚱하게도 유대인 출신 병원장이 가톨릭을 모독한 것으로 비화해 버린다. 신성모독죄로 재판에 회부된 베른하르디를 대신해 부원장이 원장직을 맡으면서 병원 내 권력 다툼이 심화한다.
아트루어 슈니츨러는 이 작품을 ‘5막의 희극’으로 명명했다. 인간 내면의 풍경 묘사에 집중했던 슈니츨러가 사회 문제로 시선을 돌리고 있음을 증명하는 중기 대표작이자, 형식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베른하르디 교수〉는 최근 세계적인 두 연출가의 선택을 받아 재조명 중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연출가 오스터마이어와 영국 연극의 미래로 평가받는 로버트 아이크가 작품의 시의성에 주목해 현대적 감각의 <베른하르디 교수> 무대를 선보인 것. 특히 관객, 평단의 찬사를 받은 아이크 연출의 <더 닥터>는 2023년 한국 국립극장 엔톡라이브로 국내 관객에게도 소개되었다. 타자 혐오와 차별 위험성에 대한 주제는 작품이 발표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200자평
1900년경 빈 소재 병원을 배경으로 병원장인 유대인 베른하르디가 병원 내 권력 다툼에서 반유대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가는 과정을 날카롭고 면밀하게 그려 냈다. 방대한 분량에 긴밀한 구성은 슈니츨러의 극작가로서 노련함을 보여 준다. 작가가 인간 내면 풍경에 집중했던 전기 경향을 극복하고 사회적 문제로 문학적 지평을 넓혀 가는 도정에 있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지은이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년 5월 15일 유대인 후두 전문의 요한 슈니츨러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제 슈니츨러의 아들로 빈 프라터가에서 태어났다. 1879∼1884년 빈 대학에서 의학을 수학하고 1885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친교를 나누면서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간다. 1886년부터 1893년까지 빈의 여러 병원에서 보조 의사로 근무했다. 작품 활동 초기인 1890년부터 1899년까지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빈 모더니즘’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슈니츨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상과 세기말 현상을 비판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부친이 사망한 뒤 전업 작가가 되어 단막극 연작 〈아나톨〉을 비롯해 단편 〈죽음〉(1894), 단막극 〈사랑의 유희〉(1895)를 연이어 발표한다. 1897년에는 열 개의 대화로 구성된 단막 연작 〈윤무〉를 발표하지만 검열로 인해 공연 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어 단편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발표했다. 1899년부터 작품 활동 중기에 해당되는 1921년까지, 슈니츨러는 심리학적 주제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인 주제를 다룬 극작품을 다수 집필했다. 〈초록 앵무새〉(1899), 소설 《구스틀 소위》(1900)가 이 시기 대표작이다. 1903년 여배우 올가 구스만과 결혼한다. 1908년 첫 장편 《트인 데로 가는 길》을 집필한다. 이 작품에서 빈 사회를 살아가는 유대인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1911년 발표된 유일한 희비극 〈광활한 땅〉은 슈니츨러 극작품 중 공연 측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바로 뒤이어 발표된 〈베른하르디 교수〉(1912)는 반유대주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5막 희극으로, 검열법에 따라 빈이 아닌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이혼 이후 슈니츨러는 심리적 고립감과 건강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한동안 세기말 개인의 운명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한 단편들을 포함 소설 집필에 주력한다. 1923년에는 오스트리아 펜(PEN) 클럽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뒤이어 소설 《엘제 양》(1924), 소설 《꿈의 노벨레》(1925)를 연이어 발표한다. 1926년 슈니츨러는 부르크극장의 명예 반지를 받는다. 1928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 《테레제. 여성의 삶의 연대기》를 발표한다. 1931년 10월 21일 빈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옮긴이
양시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연극 텍스트에 관한 연구로 문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한양대, 중앙대, 성신여대, 강릉원주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국립창원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관심사는 독일어권 근현대 드라마로, 이 작품들 중심으로 드라마 장르 형식이나 이론에 입각한 드라마 텍스트 분석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주요 연구로는 〈중세 도덕극의 현대적 재해석과 상호텍스트성−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예더만. 돈 많은 사람의 죽음에 관한 연극〉〉,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변이와 비극의 변형−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분석적 고찰〉, 〈아르투어 슈니츨러 희극론〉 등이 있으며 〈분석극의 시학: 비밀과 거짓말의 역학〉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베른하르디 : 친애하는 고문관님, 당신이 놓친 게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저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행했던 것뿐입니다.
고문관 : 놓친 게 바로 그겁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옳은 일을 행한다면, 또는 되려 어떤 사람이 아침 일찍, 별생각 없이 옳은 일을 하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 계속해서 옳은 일만 하고 있다면 저녁 식사를 하기도 전에 범죄자가 되어 있을 겁니다.
275-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