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김명주가 옮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인간이 인간임을 잊었을 때
응징의 불꽃이 속세의 모든 어둠을 태워 빛을 내는 곳, 거기는 지옥이다. 요시히데는 불세출의 화가, 영주는 지옥을 그리라 명령하고 화가는 지옥을 봐야 한다고 맞선다. 둘은 지상에서 지옥을 만든다. 딸을 불 지르고 화염은 인간을 마취한다. 그림은 남아 명작이 되었다. 지옥은 더욱 선명한 지옥이 되었다.
“요시히데, 이 밤 그대가 원하는 대로 가마에 불을 질러주겠노라.”
영주님께서는 이리 말씀하시고 옆에 있는 자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때 영주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뭔가 회심의 미소를 주고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제 기분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요시히데는 쭈뼛쭈뼛 머리를 들어 마루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역시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보아라, 그건 내가 평소 타던 가마다. 그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가마에 불을 질러 바로 눈앞에서 염열지옥을 보여줄 작정이다만….”
영주님께서는 다시 말씀을 멈추시고 옆에 있는 자들에게 눈짓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심기가 불편한 듯한 목소리로 “그 속에는 죄지은 시녀가 하나 묶인 채 타고 있다. 그러니 가마에 불을 지르면 필시 그 여자는 살이 타고 뼈가 타들어 단말마의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대가 병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게다. 하니 눈 같은 피부가 타 내리는 것을 외면하지는 말아라. 검은 머리가 불티가 되어 날아오르는 것을 잘 봐두어라.”
영주님께서는 세 번 입을 굳게 다무셨습니다만, 뭘 생각하셨는지 이번에는 그냥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웃으시다가,
“후세에 두고두고 보기 힘들 구경거리일 게야. 나도 예서 구경하고 있으마. 이봐! 발을 올려 요시히데에게 안의 여자를 보여주도록 하라!”
분부를 받든 하인 하나가 한 손에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는 성큼성큼 가마에 다가가 단번에 다른 한 손을 뻗어 발을 확 젖혔습니다. 큰 소리로 타고 있는 횃불의 불빛은 한동안 벌겋게 흔들리면서 금세 좁은 가마 속을 훤하게 밝히고, 무참히 쇠사슬에 묶여 바닥 위에 있는 여자는−아아 어느 누구로 오인할 수 있겠습니까? 화려한 자수가 놓인 분홍색 당의 위로 늘어뜨린 긴 검은 머리채가 아리땁게 드리워져 조금 기울어진 황금 비녀도 아름답게 빛나 보였고 차림새야말로 달랐지만 아담한 몸매나 하얀 목덜미 언저리는, 더욱이 쓸쓸할 정도로 조신한 옆얼굴은 요시히데의 딸임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그때입니다. 저와 마주하고 있던 무사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칼자루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정색하고 요시히데 쪽을 노려보았습니다. 놀라 바라보니 그 남자는 그 광경에 반쯤은 정신을 잃었겠지요. 지금껏 밑으로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서자마자 양손을 앞으로 내민 채 가마 쪽으로 무의식중에 뛰어가려고 했습니다. 다만 공교롭게도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먼발치에서 얼굴 표정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색이 다 된 요시히데의 얼굴이, 아니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공중에 끌려 올라간 것 같은 요시히데의 모습이, 갑자기 어둠을 가르며 뚜렷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딸을 태운 가마가 이때 “불을 지르라”는 영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인들이 던지는 횃불을 받아 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길은 순식간에 가마를 휘감았습니다. 가마 처마 끝에 달려 있던 보라색 장신구용 방울 술이 부채질을 한 듯이 날리자 그 아래에서 자욱하게 밤눈에도 허연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혹은 발, 혹은 양옆, 혹은 용마루의 금속 도구가 순식간에 타서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인가 할 정도로 불티가 비처럼 날리는 그 기세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활활 혀를 날름거리며 옆 창틀에 휘감기어 공중 중간쯤 타오르는 격렬한 화마는 마치 해가 땅에 떨어져 번갯불에 의한 불길을 용트림하며 내뿜는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앞에서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던 저도 이제는 넋이 나가 그저 망연자실하여 입을 벌리고 그 무서운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인 요시히데는−
요시히데의 그때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무의식중에 가마 쪽으로 달려가려던 그 남자는 불이 붙자 동시에 발길을 멈추고 역시 손을 뻗은 채 뚫어질 듯한 눈빛으로 가마를 휘감는 화염을 빨려 들어갈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전신에 비친 불빛 때문에 주름투성이의 추한 얼굴은 수염 끝까지도 역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크게 뜬 눈 속이나 뒤틀린 입술 언저리, 혹은 끊임없이 실룩이는 볼 살의 떨림이 보여주듯 요시히데의 마음에 교차하는 두려움과 슬픔과 놀람은 뚜렷하게 얼굴에 아로새겨졌습니다. 목이 떨어지기 직전의 죄수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울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일이 이리되자 과연 그 배포 두둑한 무사마저도 그만 안색이 바뀌어 힐금힐금 영주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영주님께서는 굳게 입술을 깨무시고는 간간이 음험하게 웃으시면서 눈도 떼지 않고 가마 쪽을 바라보고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마 속에는−아아! 저는 그때 그 가마에 탄 딸의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그것을 소상히 말씀드릴 용기는 도무지 없습니다. 연기에 숨이 막혀 위로 치켜든 그 얼굴의 창백함, 불길을 털어내고자 흐트러진 긴 머리칼 그리고 또 순식간에 불덩어리로 변해버린 연분홍색 당의의 아름다움−어쩌면 그토록 처참한 광경일까요? 특히 밤바람이 한차례 불어 연기가 저편으로 날릴 때 홍색 위에 금가루를 뿌린 것 같은 화염 속으로 떠오르며 머리채를 입에 물고 포박된 쇠사슬조차 끊을 듯이 몸부림치는 모습은 지옥의 업고를 목전에서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닌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저를 비롯한 그 강력한 무사까지도 저절로 몸을 떨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밤바람이 또 한차례 정원의 나뭇가지를 휙 스쳐가는 것이리라 누구나 생각했겠지요. 그런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 어디서 나는지도 모르게 들리는 순간 느닷없이 뭔가 검은 물체가 땅에 닿을락 말락 공같이 튀면서 성 지붕에서 불타고 있는 가마 속으로 곧장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붉은 창살이 산산조각이 나 타 들어가는 동안 뒤로 쓰러진 딸의 어깨를 안고, 천이라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한없이 고통스러운 듯, 길게 연기 속에서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어 또 두세 마디 비명이… 저희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앗” 하고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장막 같은 화염을 뒤로 한 채 딸 어깨에 매달려 있던 것은 성에 매여 있던 그 요시히데라는 원숭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원숭이가 어디를 어떻게 해서 이 성까지 숨어들었는지 물론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평소 아껴주던 딸이었기 때문에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든 것이겠지요.
그러나 원숭이 모습이 보인 것은 아주 순식간이었습니다. 금박이라도 뿌린 것 같은 불티가 한차례 휙 하늘로 치솟는가 생각하는 순간 원숭이는 물론 딸의 모습도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정원 한가운데에는 그저 한 채의 불가마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 불가마라기보다는 불기둥이라는 쪽이 그 별빛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찌르며 끓어오르는 무서운 화염의 광경에는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그 불기둥을 눈앞에 하고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는 요시히데는−어쩌면 그토록 기묘할까요. 좀 전까지만 해도 지옥고에 시달리던 것 같은 요시히데는 이제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광채를, 거의 황홀한 법열의 광채를 주름투성이인 만면에 띄우며 영주님 앞인 것도 잊었는지 팔짱을 떡하니 낀 채 우두커니 서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남자 눈에는 딸이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화염의 색깔과 그 속에서 고통에 찬 한 여인의 모습이 가슴을 환희에 넘치게 하는… 그런 광경으로 보였습니다.
더욱이 해괴한 것은 비단 그 남자가 외동딸의 단말마의 고통을 희열에 차 바라보고 있던 그 일만이 아닙니다. 그때 요시히데는 뭔가 인간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꿈에서나 나올 법한 사자왕의 분노와도 닮은 기이한 위엄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닷없는 불길에 놀라 마구 짖어대며 날아오르는 많은 밤새들마저도 기분 탓인지 요시히데의 머리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무심한 새들 눈에도 그 남자 머리 위에 원광처럼 걸려 있는 불가사의한 위엄이 보였던 것이겠지요.
새마저 그랬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하인들마저도 모두 숨을 죽이고 뼛속까지 떨리는 야릇한 환희의 기분에 차 마치 개안의 부처님이라도 보는 양 눈도 떼지 못한 채 요시히데를 바라보았습니다. 공중으로 온통 넘실대는 가마의 불길과 거기에 정신이 팔려 꼼짝달싹 못하고 서 있는 요시히데−그 어떠한 장엄함이며 환희일까요? 그러나 그중 유독 한 분 대청에 앉은 영주님만은 마치 딴 분으로 여겨질 정도로 새파랗게 질리셔서 입 언저리에 거품을 물며 보라색 바지 무르팍을 양손으로 꼭 잡으시며 꼭 목마른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며 계셨습니다.
<지옥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명주 옮김, 55~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