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김종환이 옮긴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The Choephoroi)≫
피는 피로 갚을 수 없다
아가멤논 가계는 욕정과 간계, 살인과 간통, 증오와 복수의 역사다. 기원전 484년, 그리스는 결정한다. 정의라는 뜻을 본능과 복수라고 쓰지 않고 이성과 용서라고 고쳐 쓰기 시작했다. 인간의 시대가 열렸다.
오레스테스: 따라와요.
그 사내 바로 옆에서 죽여 드리죠.
그 사내가 살아 있을 때 아버님보다 그를 더 좋아했으니까.
죽어서도 놈 옆에서 잘 수 있을 거요.
그놈을 사랑하느라, 당연히 사랑해야 할 남편을 미워했지요.
클리타임네스트라: 내가 널 길렀다.
너와 함께 살며 늙어 가게 해 다오.
오레스테스: 뭐라고요?
아버님을 죽이고도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클리타임네스트라: 얘야, 이 모든 게 몹쓸 운명 탓이다.
오레스테스: 그럼 마찬가지로 당신이 죽는 것도 운명이겠지요.
클리타임네스트라: 아들아, 넌 어미의 저주가 두렵지 않으냐?
오레스테스: 어머니는 날 낳아 놓고는 불행 속으로 날 내던져 버렸어요.
클리타임네스트라: 아니다. 친척과 함께 살도록 보낸 거다.
오레스테스: 자유인의 아들인 나를 노예처럼 치욕스럽게 팔려 가게 했소.
클리타임네스트라: 그럼 내게 널 판 돈이 있다는 말이냐?
오레스테스: 공개적으로 말하기에는너무나도 수치스런 일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네 아버지의 잘못도 잊지 말고 비난해야 할 것이다.
오레스테스: 아버님을 비난하지 말아요.
당신이 집 안에 편히 있는 동안 그분은 밖에서 열심히 일하셨어요.
클리타임네스트라: 아들아, 아낙네가 남편 없이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르느냐?
오레스테스: 그렇겠지요. 하지만 남자들이 밖에서 고생하는 덕에 여자들이 집 안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어요.
클리타임네스트라: 아들아, 제 어미를 정말 죽여야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오레스테스: 아닙니다. 당신을 죽이는 건 당신 자신이지 내가 아닙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조심해라.
어미의 원한을 복수하려는 거친 사냥개들을 조심해라.
그들이 널 추적해서 잡아 낼 것이니….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아이스킬로스 지음, 김종환 옮김), 99∼101쪽
아이스킬로스의 대표작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작품인가?
그렇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에우메니데스>다. 현전하는 아이스킬로스 비극 7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왜 어머니를 죽이려 하는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와 짜고 전장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을 살해했다. 복수를 염려해 아들 오레스테스를 멀리 쫓아 버렸다. 아버지 죽음에 복수하라는 아폴론의 신탁을 받고 몰래 귀국한 아들은 손님으로 가장해 ‘오레스테스가 죽었다’고 거짓 소식을 전한다. 안도하고 경계를 푼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차례로 살해한다.
아폴론의 신탁이 어머니 살해였다는 말인가?
아가멤논을 살해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인자들을 죽여 원수를 갚으라고 했다. ‘원수를 갚지 않으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며 결국 자신의 생명으로 빚을 갚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신탁이 없었더라도 아버지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했을 것이다.
오레스테스는 신의 뜻을 따랐으므로 모친 살해 죄를 면하나?
친모 살해 죄로 저주를 받는다. 복수의 여신들의 환영에 쫓기며 방랑한다. 다음 작품 ≪에우메니데스≫에서 모친 살해 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 아테나 여신과 아테네 시민의 심판을 받는다. 아폴론은 자신의 신탁을 따른 오레스테스를 변호한다. 모친 살해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심판의 결과는 그를 고통에서 구원하는가?
아이스킬로스는 이 작품 종막에서 코로스의 입을 빌려 그가 죽는 순간까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임종 순간까지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상처 없는 삶을 영위하지 못하리라! 오늘은 하나의 근심 걱정 내일은 또 다른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받으리라!” 이성의 영역 밖에서 삶을 위협하는,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이는 아이스킬로스 작품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슬픈 진실이다.
어째서 아가멤논 집안에는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복수가 그치지 않는가?
아가멤논의 조부 펠롭스 때부터 저주가 시작되었다. 그는 아내와 결혼할 때 미르틸로스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 대가로 피사 왕국 절반을 주고 아내와 동침을 허락하기로 약속했으나 오히려 그를 바다에 던져 죽였다. 이때 미르틸로스가 퍼부은 저주 때문에 자손들이 대대로 불행하게 지내는 것이다.
골육상쟁과 근친상간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펠롭스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배다른 동생을 죽이고 미케네 왕에게 도망쳤다. 왕이 죽고 형이 왕권을 넘겨받자 아우가 형수를 유혹해 왕위를 빼앗으려다 추방당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아우가 형에게 복수하고, 형은 다시 아우에게 복수한다. 조카들을 죽여 그 살코기로 요리한 음식을 아우에게 대접한 것이다. 아우는 달아나면서 또 한 번 처절한 복수를 결심한다.
복수란 근친상간으로 딸을 임신시켜 형에게 보낸 것인가?
아우는 형에게 복수하려면 친딸과 관계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신분을 감추고 강제로 딸을 범했다. 이 일로 그녀는 임신까지 하게 된다. 형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녀와 결혼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
그 아이는 누구인가?
아이기스토스다. 버려진 아이는 목동에게 거두어져 염소젖을 먹고 자랐다. 형은 그를 자기 자식으로 착각해 데려다 키운다. 염소젖을 먹고 자랐다는 뜻에서 아이기스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우의 복수는 어떻게 전개되나?
아이기스토스의 어머니는 뒷날 모든 사실을 알고 자기 운명을 비관해 칼로 자결한다. 친아버지의 존재를 안 아이기스토스는 어머니 피가 묻은 칼로 자신을 길러 준 큰아버지를 살해했다. 그는 뒤에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유혹해 사촌 아가멤논이 죽는 데도 일조했다.
아이스킬로스는 끝없는 복수를 무엇으로 끝내나?
≪아가멤논≫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여전히 피를 피로 되갚는 야만적인 관행이 지속된다. ≪아가멤논≫에서는 딸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남편을 살해했고,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아버지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속작 ≪에우메니데스≫는 복수의 정당성 문제를 법정이라는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새로운 문명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다.
아테네 시민은 배심원으로서 어떤 결정을 내리나?
오레스테스의 친모 살해를 두고 유죄라는 입장과 무죄라는 입장이 반으로 갈린다. 가부 동수인 상황에서 아테나는 오레스테스 편에 선다. 복수의 여신들의 기소가 기각되고 오레스테스가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이다.
이성과 용서가 격정과 복수를 이기는 것인가?
≪아가멤논≫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이 재현한 구시대는 복수를 정의의 일환으로 간주했고, 피를 피로 되갚아야 했던 야만의 시대였다. 복수의 여신들은 구시대에 속하는 신들이고 아폴론과 아테나는 각각 이성과 지혜의 신들이다. 아폴론과 아테나의 승리는 곧 격정과 복수에 대한 이성과 용서의 승리다.
아이스킬로스가 서양 연극사 첫 장을 장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개최하는 드라마 경연 대회에서 기원전 484년 최초로 우승한 이후 28년 동안 열두 번 우승하며 그리스 비극 원조로 군림했다. 특히 제2배우를 도입하고 코로스 역할을 확대하는 등 혁신적인 극작법을 도입했다. 그전까지는 배우 한 명이 가면을 바꿔 쓰면서 복수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무대에 장대한 스펙터클을 도입해 흥미를 고조한 것도 그의 공이다.
아테네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가 벌어졌나?
그렇다. 축제 기간 동안 1만 5000명 내외의 아테네 시민들이 원형극장에서 많은 비극 작품을 감상했다. 그리고 시민 다섯을 심판으로 선출해 출품작의 우열을 가렸다. 아이스킬로스에게 마지막으로 이 대회 우승을 안겨 준 작품이 바로 ≪오레스테스≫였다.
아이스킬로스의 주제는 무엇인가?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둘러싸여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통찰력 있게 그렸다. 하지만 인간이 고통을 겪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통한 지혜 체득을 강조했다. 이는 그리스 비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다 갔나?
아테네 인근 엘레우시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20대부터 본격적으로 극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군인으로서 페르시아 전쟁 당시 마라톤 전투에 참전해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아테네를 떠나 시칠리아에 살다가 기원전 456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종환이다.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다.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에 주력했으나 지금은 그리스 비극 작품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