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일꾼들
김희경이 뽑아 옮긴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바다의 일꾼들 천줄읽기(Les Travailleurs de la mer)>>
10% 발췌의 깊고 깊은 세계
소설가 위고는 위대한가? 언제 그런가? 이야기의 흐름이 멈추고 몽상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시간과 공간, 안과 밖, 이성과 감성, 영혼과 육체의 모든 벽이 상상력의 열에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순간, 빛이 시작된다.
어둠은 침묵이다. 하지만 이 침묵은 모든 것을 말한다. 어둠의 침묵에서 장엄하게 도출된 결과가 신(神)이다. 신은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인간 안에 있다. 삼단논법들, 논쟁들, 부정들, 체계들, 종교들, 이 모든 것들이 이 개념을 축소하지 못한 채로 그 위를 지나간다. 어둠 전체가 이 개념을 긍정한다. 하지만 혼란은 이 개념이 아닌 나머지 전체에 있다. 기막히게 놀라운 내재성이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이 어둠 전체가 균형 잡혀 있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우주는 허공에 떠 있는데도, 그 안의 어떤 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엄청난 규모로 이동을 한다 해도 사고 한 번 없이 균형을 깨트림 없이 이루어진다. 인간 역시 이 공전 운동에 참여한다. 인간이 겪는 많은 진동들을 그는 운명이라 부른다. 운명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자연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사건과 계절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슬픔과 비 사이에는, 미덕과 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한 시간은 한 번의 파동이 아닐까? 이러한 인간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톱니바퀴와 같은 일정한 움직임은 무심한 변화를 계속한다. 별이 총총한 하늘은 바퀴, 시계추, 평형추의 모습이다. 이는 최고의 명상으로 두 배가 된 최고의 관조다. 이는 모든 현실이며, 더하여 모든 추상이기도 하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사로잡혀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 어둠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톱니바퀴 장치 안에 맞물려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전체의 구성 요소다. 우리는 자기 내부의 미지의 것이 외부의 미지의 것과 불가사의하게 연대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죽음의 숭고한 예고다.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이 얼마나 황홀한가! 무한에 가담함으로써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불멸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누가 알겠는가? 범람하는 우주적 생명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끈질기게 침몰하지 않는 이 자아를 느끼는 것을 보면 영원성이란 가능하지 않을까! 별들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한다. “나도 너희들처럼 영혼이야!” 어둠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한다. “나도 너처럼 심연이야!”
≪바다의 일꾼들≫, 빅토르 위고 지음, 김희경 옮김, 102~103쪽
“불가사의하게 연대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무엇에 대한 예감인가?
전체에 대항하는 무의 싸움, 전 우주에 대항하는 미약한 영혼의 싸움, 이것이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다.
어떤 정황에서 일어나는 직관인가?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 짓눌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무한에게 은총을 갈구하는 질리아트. 영혼에게 우주가 화답하듯 신비로운 응답이 온다. 태풍이 불고 격랑이 이는 바다가 자장가를 속삭이는 바람과 요람을 흔드는 잔잔한 물결로 바뀐다. 숙명이 섭리로 변하는 순간이다.
≪바다의 일꾼들≫은 어떤 소설인가?
위고가 망명기 말기에 쓴 장편소설이다. 1866년에 출간되었다. 소설의 배경이 된 영불해협의 건지 섬은 20년의 망명 생활 중 15년을 보낸 곳이다. 소설 속에는 망명 생활의 생생한 체험이 살아 있다.
작가가 왜 망명을 하게 되나?
1851년 12월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의한 집정에 항거했다. 1852년 초 벨기에를 거쳐 저지 섬에 정착해 근 3년을 보낸 뒤 1855년에 건지 섬으로 옮겨 다시 15년을 눌러앉는다.
쉰 줄에 들어 떠난 망명은 그에게 무엇을 주었나?
사회 활동에 분주했던 작가의 정신과 시선을 오롯이 내면세계와 우주로 향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건지 섬 위고의 집필실엔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수평선과 이따금 찾아오는 갈매기들만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전 우주와 홀로 마주 선 외로운 영혼이 되어 작품 세계의 새로운 영역을 연다. 작품 주제가 인간 세계를 넘어선다. ‘존재’ 전체가 떠오른다.
망명 시절의 사색을 통해 위고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인간의 내면과 우주에 대한 심오한 비전을 얻는다. 이후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관조’라는 새로운 인식 방법을 획득한다. 관조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안으로는 가장 내밀한 ‘영혼’으로 파고들고, 밖으로는 무한한 ‘우주’의 신비로운 영역 언저리까지 확장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소설도 이러한 심오한 비전을 잘 보여 준다.
이 소설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불가피한 존재인 자연이다. 인간의 숙명인 사물들, 그리고 물, 불, 바람, 대지와 같은 원소들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뱃사람 이야기가 아니란 말인가?
제목 때문에 바닷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회소설로 오해받곤 한다. 여기서 ‘일꾼들’은 뱃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자연현상들, 일렁이는 물결, 불어오는 바람, 태양, 자기력을 머금은 빛, 암초, 보이지 않는 해저 세계를 품고 있는 바다이기도 하다.
자연 자체가 일꾼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자주 작품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한 ‘일꾼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인간인가, 자연인가?
주요 등장인물은 이 섬에 들어와 살게 된 질리아트, 동력 기계가 발명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증기선을 만들어 ‘생말로-건지 섬’ 왕복선 뒤랑드호를 운행하는 메스 르티에리, 그의 사랑하는 조카딸 데뤼셰트, 메스 르티에리 후임으로 뒤랑드호의 운행을 맡는 시외르 클뤼뱅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주역들은 바다와 바람, 폭풍우, 문어 등이다.
시외르 클뤼뱅이 어떤 사건을 만들어 내는가?
안개 낀 날 암초에 부딪쳐 뒤랑드호를 좌초시킨다. 하지만 동력 기계장치만은 무사했다. 좌초한 곳은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다. 그곳에서 동력 기계장치를 구해 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데뤼셰트는 그 일을 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질리아트가 자청하고 나선다.
질리아트는 어떤 캐릭터인가?
자연 친화적이며 자연에 대한 혜안을 가진 인물이다. 몽상가이기도 하다. 자연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심층적으로 탐색한다. 관조의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로까지 나가려 한다.
질리아트의 행동은 우주에 대항하는 일인가?
작업 대상이 무한한 자연인 바다이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우주 전체가 관여되어 있다. 바람과 바다, 공기와 물은 분할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하나다. 이곳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을 수행하려면 우주 전체의 작업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두 달 동안 바다 한가운데 있는 두브르 바위에서 작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티끌처럼 미미한 한 사람의 ‘바다의 일꾼’이 무한에 가까운 ‘바다의 일꾼들’에 맞서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한다.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여자 때문인가?
데뤼셰트라는 처녀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혼,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길잡이가 되는 것은 영혼의 이미지다.
위고의 소설에서 영혼의 이미지가 여성 인물로 형상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데뤼셰트가 이러한 이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1, 3부에만 등장하는 그녀의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러나 역할만은 핵심적이다. 그녀는 새를 연상시키는 외모,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내면을 지녔다. 순수한 영혼의 화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질리아트 내면의 어둠을 깨운 것이 그녀인가?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짓고 눈 위에 그의 이름을 쓴다. 그냥 장난삼아 한 짓이었다. 결과는 엄청났다. 그녀의 영혼의 이미지가 질리아트 마음 깊이 나사못처럼 박힌다. 그의 정체성 탐구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증기선 뒤랑드호와 데뤼셰트의 관계는?
이름의 어원이 같다. 데뤼셰트는 새처럼 가벼운 이미지다. 뒤랑드호는 화력으로 바다를 가볍게 항해하는 강력한 부력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뒤랑드는 데뤼셰트의 분신이다. 데뤼셰트가 등장하지 않는 2부 내내 뒤랑드호의 기계장치는 그녀를 대신한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영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 끝에서 질리아트는 바다에 잠긴다. 자살인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곳을 응시한 채 무한의 바닷속으로 잠기는 그의 죽음은 삶의 종말과는 다른 인간의 내적 신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고정된 시선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어둠이 깃들고, 그의 깊은 눈에는 어둠의 거대한 평온함이 어린다.
위고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한 것인가?
깊은 바다 한가운데서 뒤랑드호의 기계장치를 되찾아 돌아오면서 질리아트는 내면의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깊은 눈빛이 이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심층 탐색의 동기이며 길잡이가 되었던 데뤼셰트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좋은 이유가 그래서인지 모른다. 정체성을 찾은 질리아트가 어둠 속에 침잠하는 것이 그토록 평온해 보이는 것은 위고가 보여 주려는 죽음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위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 어떻게 번역하게 되었는가?
위고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서, 특히 시 세계에서 우주 전체에 대한 관조적 사색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압축된 시를 풀어내듯 건지 섬에서 십수 년을 보낸 위고가 품은 망명 시기 사고의 정수를 잘 드러내 준다.
10% 발췌다. 내용 파악에 문제는 없을까?
이야기 흐름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부분과 몽상의 부분을 모두 놓치지 않고 발췌했다. 위고 소설에서 나타난 서술의 현대성을 지적한 한 평자에 의하면, 소설가로서 위고의 위대성은 이야기의 흐름이 멈추고 몽상이 시작되는 시적인 시간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2부에서 특히 이러한 몽상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이야기의 선적인 흐름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작가의 상상력이 창조해 낸 전체 공간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희경이다. 프랑스 그르노블 제3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