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순 동화선집
원유순이 짓고 신헌재가 해설한 ≪원유순 동화선집≫
한이 풀리는 시간
분노와 실망, 열패감과 울분이 차곡차곡 쌓이면 포기와 체념이라는 효모를 통해 한이 발효된다. 시간은 돌아가지 않으므로 결자해지는 불가능하다. 오직 새로운 시간만이 부패를 막아 마음을 구한다.
아이들은 다시 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제히 장구, 소고, 징, 꽹과리를 빠르게 쳐 나갔다.
그러자 대학생 누나와 형들이 놀이판에 끼어들어 어깨춤을 추었다.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농악반 아이들 틈에 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양손을 번갈아 치켜들며 실룩실룩 흥겹게 놀이판에 끼어들었다.
러시아 아이들도 처음에는 겸연쩍게 웃기만 하다가 곧 놀이판에 같이 끼어들었다. 서로서로 손에 손을 잡고 자신의 기분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모두가 어우러져 신명 나게 춤을 추기 시작하자 농악반 아이들은 점점 더 신이 났다.
많은 사람이 놀이판에 끼었기 때문에 상모는 돌릴 수 없었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바탕 놀이마당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러시아 민속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빠른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러시아 아이들이 먼저 박수를 치면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음악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모든 사람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 손을 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꼬아 가면서 몸을 흔들었다.
하나, 두울, 세엣.
두 박은 그냥 앞으로 걸어가고 세 박자째에 몸을 꼬아 가며 돌아갔다. 왈츠 스텝이었다. 그리고 악단이 트레몰로 주법을 강하게 연주하면 모든 사람이 엉덩이를 흔들며 앉았다 일어섰다.
너무 재미있는 춤이었다. 엉덩이를 흔들며 다 같이 앉을 때는 모두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한마음이 된 멋진 춤판이었다.
<둥근 하늘 둥근 땅>, ≪원유순 동화선집≫, 원유순 지음, 신헌재 해설, 208~209쪽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해피 엔딩인가? 역사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닌가?
어린이문학은 순수한 동심을 기저로 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학이어야 한다. 동심을 지닌 어린이라면 이념과 분쟁을 넘어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소재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남북 분단의 비극과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 때문에 생긴 한인데, 어른들이 만들어 낸 산물일 뿐 동심의 어린이와는 무관한 일이다.
어른이 만든 한을 어린이는 어떻게 지양하는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어린이는 어린이끼리 통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끼리 통한다. 이데올로기를 넘어 둥근 하늘 둥근 땅처럼 서로 만나 친구가 되자”는 의미의 합창과 춤을 선택했다. 조금은 상투적이더라도 희망을 주는 메시지로 결말을 맺고 싶었다.
평론가 신헌재는 당신에게 ‘거시적 작풍’이 보인다고 했다. 동의하는가?
그는 이 책의 해설에서 “초등학교 교실 언저리에서만 헤매는 근시안적인 교단 작가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역사의 질곡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려 거시적인 작풍”을 보인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사가 보는 사회와 역사의 질곡은 어떤 것인가?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어린이의 학교생활을 담은 이야기를 많이 썼다. 대부분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받는 어린이들을 소재로 삼았다. 예를 들면 임대 아파트에 사는 서민층 아이들(≪열 평의 아이들≫), 왕따 당하는 결손가정 아이(≪까막눈 삼디기≫), 한센병 미감아들(≪넌 아름다운 친구야≫), 소아 비만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뚱보 은땡이≫), 다문화 가정의 아이(≪우리 엄마는 여자 블랑카≫, ≪하이퐁세탁소≫)가 그들이다.
당신의 문학에서 역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시대의 아픔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는가를 조명하고자 노력했다. 한국전쟁 후 피폐한 현실에서 자식을 입양 보낸 부모의 아픔을 드러낸 ≪얀손 씨의 양복≫과 한국전쟁의 피해자로 흑인 혼혈아를 낳은 여인의 슬픈 가족사를 그린 ≪김찰턴순자를 찾아 줘유!≫ 등이 그렇다.
<둥근 하늘 둥근 땅>도 그런 맥락의 작품인가?
1983년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의 미사일에 격추당한 사건을 신문기사로 읽었다. 당시는 동서 냉전의 시대였는데, 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소련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터뜨렸다. 그런 기억들이 훗날 작품으로 탄생했다.
작품 내용이 실제 경험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집필 1년 전 집에 러시아 아이들이 왔다. 우리 아이가 부천소년소녀현악합주단에 속해 있었는데, 합주단과 결연을 맺은 러시아 하바롭스크 민속 무용단원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웃고 떠들며 신나게 어울렸다. 보면서 착잡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멀리는 한국전쟁, 가까이는 KAL기 격추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어린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음악’이라는 예술을 매개로 삼았다.
당신의 주인공, 심심찮게 나타나는 ‘영악한 어린이’는 어떤 인간인가?
단편동화 <잔소리 할머니>의 ‘신애’는 삼촌의 애인이 할머니의 마음을 살 수 있게 묘책을 낸다. <꿈꾸는 아이>의 ‘미정’이는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마음을 얻을 계책을 꾸민다. 얼핏 <둥근 하늘 둥근 땅>의 ‘누리’보다 영악한 현대 도시 어린이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겉으로 보이는 영악함 이면에 숨어 있는 순수한 동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요즘 어린이들이 영악하다고는 하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순수함 때문에 ‘아,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로구나’ 하며 미소 지을 때가 많다.
유년의 기억은 어디에 있나?
대부분 영월군 주천면 중선리와 원주시 일산동에 머물러 있다. 중선은 한창 놀기를 좋아했던 열 살 무렵의 추억을 고스란히 지닌 곳이다. 산골 중에서 심심산골, 농지라고는 산비탈 옥수수밭이 전부이던 그곳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던 내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사계절을 산과 들로 쏘다녀서 종아리는 성한 데가 없었고, 이마는 까맣게 타서 반질거렸다. 그곳에서 살아 숨 쉬는 작은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체험했고, 자연이 주는 혜택을 감사하며 받을 줄 알았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는가?
책이다. 5학년 2학기에 친구의 도움으로 반장이 되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다른 아이가 반장이 되기를 원했는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나를 닦달했다. 그러던 중 공설 운동장에서 관내 국민학교 연합 체육대회가 열렸다. 담임은 교실 청소가 안 되었다며 내게 혼자 남아 청소를 하라고 했다. 청소를 마치고 할 일이 없어 교내를 기웃거리다가 방치된 도서실을 발견했다. 우연히 접한 도서실에서 먼지 쌓인 책들을 꺼내 홀린 듯이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소설가나 시인이 되고 싶었다. 인천교대 시절 ‘청아’라는 문학 동아리 활동을 했고 학보사에 소설을 응모하기도 했다. 학보사에 응모한 소설을 보신 손동인 교수님이 연구실 조교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화’라는 장르를 알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동화를 접한 건 초등학교 교사가 된 이후이며 그때부터 막연히 동화작가의 꿈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가사와 교직 생활을 병행하느라 문학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갔다. 그러다 한 번씩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1980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크리스마스 선물>이 최종심에 올랐으나 당선은 안 되었다. 이후 ≪새교실≫과 ≪아동문학평론≫에서 추천을 받았다. 1993년 한 해에 계몽아동문학상과 MBC창작동화대상에 장편과 단편이 당선되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입증한 타이틀은 무엇인가?
≪까막눈 삼디기≫는 독자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 출간된 지 10년째인 2010년, 우리 아동문학에서 드문 100쇄를 달성하는 영광을 얻었다.
여주 산골에 사는 까닭은 무엇인가?
늘 산골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던지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산골에서 전업 작가로 생활한다. 그러나 대학 강의와 강연, 여전히 바쁜 일상으로 글쓰기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대학 강의를 줄이고, 집필에 더 많은 힘을 쏟으려고 한다.
앞으로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자연을 소재로 한 동화와 우리 신화를 바탕으로 한 동화를 쓰고 싶다.
당신은 누구인가?
원유순이다. 동화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