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상상하다: 다큐멘터리의 철학과 작업
최정민이 옮기고 마크 커즌스(Mark Cousins)와 케빈 맥도널드(Kevin Macdonald)가 엮은 <<현실을 상상하다: 다큐멘터리의 철학과 작업(Imagining Reality)>>
다큐멘터리가 살아났다
텔레비전의 엷음, 상업영화의 공식에 지친 관객의 기대가 현실로 눈을 돌렸다. 존재와 현실의 무게감을 새로운 기법과 발상이 진실로 부활시킨다. 이제 스마트폰 다큐의 폭발을 기대할 때다.
<<현실을 상상하다>>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책인가?
다큐멘터리 100년 역사에서 꼽을 수밖에 없는 주요 감독과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다.
다양한 각도란 무엇을 뜻하는가?
다채롭고 인상적인 평론과 인터뷰, 기고문이 동원된다. 제작자의 말과 글을 우선 선별했다. 거장의 작품 세계와 철학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이 드러내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은 어떤 것인가?
창조성과 형식의 다양성이다. 다큐멘터리 아버지 존 그리어슨은 다큐의 역할을 민주주의 가치 계몽으로 설파하고 장르 기반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장르의 미학적 가능성에 선입견을 낳았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다수의 장르라는 점을 일깨운다.
이 책이 말하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과거엔 가공되지 않은 진실을 제공하는 객관적 현실 기록에 중심을 두었다. 1990년대부터 다큐는 더 이상 현실을 투명하게 담아내는 창이 아니다.
감독의 사적 관점과 독특한 미학 선택이 빚어낸 주관 진실의 결과물이다. 이론과 실천 진영 모두가 공유하는 정의다.
목적은 무엇인가?
소통, 커뮤니케이션이 아닌가?
최근 한국 사회와 적극 소통을 시도한 다큐멘터리는 무엇인가?
<두 개의 문>이다. 주류 언론이 조명하지 못한 용산 참사의 숨은 진실을 전했다. 이런 소통은 정책과 제도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최근 해외 작품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작품은 무엇인가?
모건 스펄록의 <슈퍼 사이즈 미>다. 감독은 한 달간 하루 세 끼 햄버거를 먹으며 자신의 몸에 미치는 악영향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맥도널드가 슈퍼 사이즈 옵션을 중단시키는 데 일조했다. <식코>는 미국 의료보험 제도의 허점을 파헤쳤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의료보험 개혁을 위한 결정적 여론을 형성했다.
다큐멘터리는 사회 문제만 다루나?
모든 현실의 소재가 사회적이다. 하지만 사회참여와 폭로라는 저널리즘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다큐가 정치 사회적 관심사만 다루는 진지하고 융통성 없는 장르로 여기지는 것은 편견 때문이다.
편견을 넘어서면 무엇을 만날 수 있나?
이제는 사적인 관점과 개인적 스타일을 담는 표현 수단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이 책은 다큐가 표현 형식과 소재의 경계를 거침없이 확장하며 다채로운 변화를 거쳐 온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역동적인 다큐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어느 것인가?
크리스마커의 <태양 없이>다. 주관적인 의식과 기억,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예술적 소통을 경험할 수 있다. 소통은 성찰로 이어지고 성찰이 생각과 현실의 변화, 또 다른 실천과 참여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되는 이슈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현실에 조작을 가하지 않고 가장 진실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이다. 다이렉트 시네마나 시네마 베리테 같은 사조가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무엇인가?
1960년대 미국의 지배적 다큐멘터리 제작 스타일이다. 제작자의 개입이나 카메라, 편집 조작을 최소화하고 관찰을 통해 인물과 사건을 영상에 담는다. 그렇게 하면 극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진실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네마 베리테란 무엇인가?
베리테 자체는 거친 입자의 화면이나 핸드헬드 촬영 같은 영상 제작 스타일이다. 시네마 베리테는 감독이 직접 인물과 사건에 개입한다. 카메라는 어떤 상황을 유도하는 촉매제가 된다. 그렇게 하면 더 진실을 잘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다큐멘터리에서 에세이 필름의 특성은 무엇인가?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인다. 작가적 사유와 주관성이 강조된 하이브리드 양식이다. 연대기적 구성 같은 전통적 다큐 관습을 강요하지 않는다. 장 뤽 고다르의 표현대로 ‘생각하는 형식이자 형성하는 생각으로서의 영화’다. 본질에 조응하는 매력적인 장르다.
논픽션 다큐멘터리에 왜 상상력이 필요한가?
거대한 현실의 표면에 부표처럼 떠 있는 작고 평범해 보이는 실마리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 잠재력을 가늠해야 한다. 거기에 어떻게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좌우한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단순한 재생이 아닌 미적 재현이라고 할 때 스토리를 담아낼 그릇, 형식에 대한 미학적 상상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다큐멘터리가 상상력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 감독은 상상이나 변경이 쉽지 않은 단단하고 딱딱한 현실을 원재료로 받아든 요리사다. 재료에 대한 특유의 심미안과 해석, 독특한 레시피를 통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새로운 현실의 맛과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단단한 원석에서 상상력으로 조각상을 깎는 것과 같다. 다큐멘터리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 현실에는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사 구축이나 촬영 스타일, 편집 기법에서는 서로의 특징을 활용하거나 공유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현실과 실존의 무게감은 감독의 컷 소리로 바뀔 수가 없다.
현실과 실존의 무게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나?
수업에서 전쟁 다큐 <산피에트로 전투>와 극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전투신을 번갈아 보여 준다. 다큐에서 병사들은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러나 거친 전투 장면 뒤에 이들은 시체 처리 포대 속에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다. 영화에선 기관총을 맞은 병사의 사지가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배우는 영화 밖 안전한 현실로 돌아온다. 다큐멘터리에선 불가능한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거대 예산의 상업영화에 투자를 집중한다. 뚜렷한 흥행공식이나 투자 대비 수익이 검증되지 않은 다큐 제작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박스 오피스 역대 수익 3위에 랭크된 <저스틴 비버: 네버 세이 네버>는 파라마운트가 기획 제작을 맡았다.
그럼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제작과 배급은 누구의 몫인가?
여전히 중소 규모 배급사와 제작사가 한다.
다큐멘터리의 산업 기반은 어느 수준인가?
다큐멘터리는 지금까지 산업에 필요한 표준화된 흥행공식과 일관된 규범으로 발전해 온 극영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디지털 장비가 보편화되면서 매해 수천 편의 저예산 독립다큐멘터리가 쏟아지지만 몇 작품을 제외하곤 극영화 대비 극장 개봉률이나 수익률이 미미한 수준이다.
수익도 저조한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금전적 성공보다 사회적 파급력을 원한다. 이런 흐름은 국내외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 장르가 부활한 계기는 무엇인가?
텔레비전에 식상하고 상업영화에 싫증난 관객이 돌아왔다. 극영화의 편집 기법과 음악을 사용하고 더 극적인 서사 구조를 채택하면서 재미있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가 극영화를 추월하는 날이 도래할까?
그런 날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장르적 한계와 정체성을 실험하고 그 가능성을 확장하는 역동적인 진화 과정을 멈추지 않을 때 장르의 미래가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빔 벤더스는 왜 중요한 감독인가?
이 책은 1990년대 말 그의 작품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 다큐멘터리 장르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평가한다. 당시 주류 영화팬의 주목을 끌지 못했던 다큐의 운명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 후 <펭귄들의 행진>, <볼링 포 콜럼바인>, <슈퍼 사이즈 미> 같은 작품이 연이어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최근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흐름은 무엇인가?
다양한 스타일로 진행되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혼종화 현상이다. 장르를 둘러싼 서사의 경계, 즉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활발한 영화적 시도다.
장르 혼종의 다양한 시도는 어떤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나?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아리 폴먼 감독의 <바시르와 왈츠를>, 극영화적 미장센과 관찰 양식을 결합한 울리히 사이들의 <모델>,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흥미롭게 실험하는 자파르파나히 <거울>이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젊은 세대 가운데 미래 다큐멘터리 거장이 나올 수 있을까?
나올 거라 믿는다.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펜으로 글을 쓰듯 카메라로 자기 이야기를 기발하게 푼다. 마이클 무어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화면에 가득 채우며 진실을 탐사하는 당당하고 개성 있는 감독들이 나올 것이다. 그들은 지금보다 덜 계몽적이고, 진지하며, 더 역동적이고 재미있게 만들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정민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