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최명익 단편집
이훈이 엮은 ≪최명익 단편집≫
그는 책만 본다
주인공 정일은 당대의 지식인이다. 현실은 멀어진다. 아버지는 암으로 죽고 애인은 폐병 환자다. 그들이 점점 더 귀찮아진다. 현실을 잃은 자의식은 자폐증이 된다.
“만주루 북지루 댕겨보문 돈벌인 색씨 당자가 제일인가 보둔.”
당꼬바지가 불쑥 이런 말을 시작하였다. 모두 덤덤히 앉았던 사람들은 마침으로 흥미 있는 이야기꺼리가 생겼다는 듯이 시선이 그에게로 몰리자 그의 옆에 앉은 가죽 짜켙이 그 말을 받았다.
“돈벌이야 작히 좋은가요, 하지만 자본이 문제거든, 색씨 하나에 소불하 돈 천 원은 들어야 한다니까.”
“이것이라니 아무리 요좀 돈이구루서니, 천 환이문 만 냥이 아니요.”
이렇게 놀란 것은 물론 곰방대 영감이었다. 그러자 아까 그 실수를 한 젊은이가,
“요즘 돈 천 환이 무슨 셍명 있나요, 웬만한 달구지 소 한 놈에두 천 원을 안 했게 그럼네까.”
하고 이번에는 조심히 제 발 뿌리에다 침을 뱉았다.
“그랜 해두, 넷날에야 원틀루 에미나이보단 소끔새가 앞셋디 될 말인가.”
“녕감님, 건 촌에서 밋메누리 감으루 딸 팔아먹던 넷말이구요?…”
≪최명익 단편집≫, <장삼이사>, 최명익 지음, 이훈 엮음, 137~138쪽
“색씨 당자”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만주에서 장사하는 ‘포주’가 기차에서 자신의 ‘사업’ 얘기를 떠벌린다. 그는 기분이 나빠지면 아무에게나 손찌검을 한다.
기차에서 자행되는 손찌검은 무엇을 말하는 행위인가?
폭력이다. 그러나 그의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방관하는 대중의 폭력이다. 승객 가운데 폭력을 말리는 사람은 없다. 몇몇은 포주와 대화를 나누고 작은 술판에 끼어 동조하기에 이른다.
1941년 상황에서 방관하는 대중이란 누구인가?
당시 조선의 대중이 불의에 개입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최명익은 그들에게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 이 작품에서 대중은 외부 힘의 무게 중심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시대가 폭력이 되면서 대중은 잔인한 방관자가 된다.
≪최명익 단편집≫에는 실린 작품은 무엇인가?
<장삼이사> 외에 <심문>, <무성격자>, 이렇게 세 편을 실었다.
<심문>에서 동경 유학생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동경 유학한 화가 김명일과 모델 여옥이 등장한다. 엘리트 젊은이가 시대의 어둠에 치여 방황한다. 마약에 빠지기도 한다. 여옥의 자살로 끝난다.
작가가 말하는 찾아야 할 그 어떤 ‘별빛’은 무엇인가?
봉건으로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지식인에게 필요한 가치와 방향이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근대로 가는 별빛을 찾지 못한다. 그에 대한 희망까지 잃어버린 채 ‘제 심정을 바칠 곳이 없어서’ 스스로 죽어 가는 인물을 그린 것이 소설 <심문>이다. 그들의 자멸은 근대적 가치 체계에 대한 항의이자 비타협적 저항인 셈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자살이 근대 가치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은 심한 온정주의 아닌가?
이광수는 근대를 희망과 유토피아의 이미지로 그렸다. 그러다 최명익에 이르자 근대는 베일을 벗고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다. 근대 문명이라는 목표를 주문처럼 외울 때는 망상이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망상이 깨지자 모든 희망은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쓰디쓴 자각의 뒷맛뿐이었다.
자각의 뒷맛이 자살이라면 누가 자각을 하겠는가?
작품에 표현된 상징적 자살 행위는 패배가 아니라 투쟁이다. 가혹한 현실이 강요하는 선택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돌려놓은 자발적 행위다. 영웅적 투쟁의 몸짓이다.
역사의식을 ‘자기 파멸’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한계가 선명하지 않은가?
최명익은 현실의 모순이 정체성의 모순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파악했다. 인물이 자기 파멸에 도달하는 상황의 한계 또한 분명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지식인 주인공은 자신의 무기력을 깨닫는다. 현실과 함께 마모되는 인물의 모습은 개인으로서 자신을 통렬하게 자각해 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무성격자>의 주인공 정일의 자의식은 지식인의 공통점인가?
주인공 정일은 당대의 지식인이다. 아버지는 암으로 죽어 가고 내연녀 문주는 폐병 환자다. 정일은 두 사람을 다 귀찮아한다. 자의식이 지나쳐 이기성에 닿는다.
식민지 근대를 포기한 작가가 이기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지식인 특유의 거리감과 자존심을 비판한다. 그것이 사실은 얼마나 심각한 기회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표현했다.
정일이 독서에만 빠져 무성격자가 된다는 관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책만 본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진정한 사건과 체험을 잃는다. 그를 둘러싼 모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제목 ‘무성격자’는 이런 관점을 암시한다.
최명익의 소설을 어떻게 소개하게 되었는가?
그는 1903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주로 북쪽 지방 및 만주에서 활동했다. 남북 단독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47년에 서울 을유문화사에서 작품집 ≪장삼이사≫가 나왔다. 이 책은 1947년 ≪장삼이사≫의 텍스트를 이용했다.
최명익은 누구인가?
육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동생 최정익은 평양에서 발간된 동인지 ≪단층≫의 중심 멤버였다. 1921년 일본 유학을 통해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심취한다. 1928년 홍종인, 김재광, 한수철 등과 함께 동인지 ≪백치≫를 만들고 여기에 <희련시대>, <처의 화장>을 발표했다. 1936년 <비 오는 길>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도스토옙스키의 수법”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론 <이광수 씨의 작가적 태도를 논함>에서 그가 주장한 것은 무엇인가?
‘이광수의 문학은 시대상을 관찰함에 경제학적 사회과학적 근거를 두지 않은 관념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해방 후 사상적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은 무엇인가?
해방 직후 여러 사람과 함께 간행한 ≪관서 시인집≫이 쉬르레알리슴 시라는 점에서 문제가 돼 공산 계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길을 택했다. 1956년 발표한 역사소설 ≪서산대사≫는 민중과 지도자의 결합을 강조, 북한 문예의 모범으로 평가받는다.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훈이다. 2007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