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선 1. 속물과 잉여
김상민·김수환·김홍중·백욱인·서동진·소영현·송제숙·안천·이길호·한윤형이 쓰고 백욱인이 엮은 <<논문선 1. 속물과 잉여>>
우리 이미 속물이지만, 벌써 속물은 되지 말자
세계화와 인터넷 그리고 경쟁의 격화는 잉여를 낳는다. 잉여는 잉여짓을 하고 그것이 낯선 386들은 헛기침으로 혁신의 기억을 날려 보낸다. 지금 대한민국에 속물과 잉여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논문선’이 무엇인가?
발표된 논문을 새로운 주제의식으로 골라 다시 배치한 ‘책-장치’다.
그런 ‘책-장치’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좋은 논문이 많이 발표되지만 대중과 연결되지 않는다. 전문 논문이 대중 의식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학술 논문은 발표하면 어느 정도 읽는가?
논문 심사자와 관련 전문가 몇 명이 읽는다. 연구자도 남의 논문을 별로 읽지 않는다. 전문화의 폐해다. 학술지에 실리고 나면 끝이다.
주제별 논문집 형식의 책은 처음이 아니다. 이 책은 뭐가 다른가?
주제 논문집은 기획하여 집필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 책은 주제별 묶음집이지만 이미 발표된 논문을 선택하고 배열한다. 논문 재활용이다.
‘재활용’해서 다른 방식으로 출판하면 더 많은 대중과 연결된다고 확신하나?
그것은 주제 선정과 문제의식, 선택과 배열, 그리고 선별된 논문의 힘에 달린 문제다. 대중은 충실한 문제의식과 섬세한 분석, 좋은 문장으로 구성된 책에 매력을 느낀다.
어떤 논문을 골랐나?
선택과 배열만으로 뭔가를 전달하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논문이 모여 새로운 이야기가 되도록 고르고 안쳤다. 선택과 배열 자체로 말할 수 있는 것, 그게 선별의 기준이었다.
첫 호의 주제가 ‘속물과 잉여’다. 무슨 뜻인가?
인터넷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대중의 생활과 의식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차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는 지점을 찾았다.
속물 에토스의 핵심은 무엇인가?
속물 에토스는 일상의 삶과 닿아 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영악하고 비루한 자세이자 태도다.
우리 시대의 속물은 누구인가? 특히 386세대를 가리키는 것인가?
속물은 그냥 속물이다. 386세대만 속물이겠는가? 단, 속물이 되려고 해도 되지 못하는 계급과 집단이 있다. 속물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비교적 안정된 일자리다.
속물의 전제 조건이 안정된 일자리라면 잉여의 물적 기반은 무엇인가?
잉여의 기반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보자본주의다. 잉여는 세계화와 인터넷, 그리고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다.
잉여는 아웃사이더인가?
잉여는 체제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잉여는 체제에 포함되어 있지만 스스로 밀려났다고 느끼며 체제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는 집단이다.
잉여가 정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잉여짓’이 정치성을 띨 수 있는가?
잉여는 정치 세력이 아니다. 주어진 상태에서 특정한 잉여의 모드를 보여 줄 뿐이다. 잉여짓은 정치성을 띨 수도 있다.
<나꼼수>와 ‘일베’는 뭔가?
<나꼼수>는 속물 잉여가 만든 정치 놀이였다. ‘일베’는 사악한 속물이 부추기는 잉여 놀이다. 놀이가 지나쳐 놀이의 선을 넘어 현실로 돌아오면 충돌이 생긴다.
잉여는 속물을 갈망하는가?
잉여는 속물들의 삶에 다다를 경제적 기회가 없다. 그들은 속물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는 틀에서 배제되어 있다. 잉여는 속물을 갈망하지는 않지만 속물의 경제적 토대는 부러워한다.
속물과 잉여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그런 길이 따로 있겠는가? 그냥 속물이나 잉여라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알음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늙은) 속물과 (젊은) 잉여의 연대는 가능한가?
연대할 조건과 이유가 만들어지면 굳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속물이나 잉여 모두 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모양새를 묘사하는 수사적 용어에 불과하다.
그런 수사적 용어를 사용하면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나?
속물과 잉여 현상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사회 현실을 보아야 한다. 속물과 잉여라는 수사는 현실의 자신을 들여다보게끔 들이대는 일종의 구리거울이다.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인 “우리 이미 속물이지만, 벌써 속물은 되지 말자”는 무슨 뜻인가?
‘이미’는 단순 시제로 과거이고, ‘벌써’는 도래하는 과거다. 데리다의 ‘future’와 ’avenir’를 과거 시제로 뒤집어 패러디한 것이다. 이 문장의 뜻은 하나가 아니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뜻이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다가가면 좋겠다. 시처럼 읊다 보면 꽂힐 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속물인가 아닌가?
나는 이미 속물도 한참 속물이다. 여러분도 자신이 이미 속물임을 인정한다면 “벌써 속물이냐?“라는 말은 듣지 않도록 과거를 미리 예비하시기 바란다.
<<논문선>> 2호 계획은 어떻게 되나? 주제가 잡혔나?
문제는 무엇을 고르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와 고를 수 있는 논문의 집합에 달려 있다. 글을 고르고 틀을 짜기 위한 마음의 흔들림이 첫 호가 나간 후에도 지속되면 좋겠다. 다음 주제는 아직 모르겠다.
당신은 누구인가?
백욱인이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