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나는 또다시 황금 나무를 볼 수 있을까
가을이다 페스트균처럼 쓸쓸함이 도처에/ 손쓸 틈도 없이 번진다 나뭇잎 지는 거리에/ 헐벗은 개가 간다 세월이 간다/ 정육점엔 여전히 쇠갈고리에 붉은 고깃덩이가/ 매달려 있고 오접된 전화벨은 가끔 예고 없이 울리고/ 지난해 입었던 옷을 꺼내 보면/ 좀벌레들이 작은 구멍을 뚫어 놓은 걸 볼 수 있다/ 지난 시간의 편린은 어디에나 조금씩 남아 있다/ 누렇게 빛바랜 옛날의 사진처럼 남아서/ 새로 단장한 페인트의 밝고 선명한 색으로 생생하게 빛나는/ 이 가을의 거리를 지나는 우리의 시름 없이/ 병든 혼을 느닷없이 기습하는 법이다/ 세월이 더 흐르고 누군가 해골을 발로 툭 차며/ 텅 비었어, 해골이야라고 말하기 전에/ 검은 눈동자가 있던 자리에 빈 구멍이 생기기 전에/ 나는 또다시 황금 나무를 볼 수 있을까
≪장석주 육필시집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152~153쪽
가을이 번진다. 손쓸 틈이 없다. 헐벗은 세월이 가고, 그처럼 삶도 비우길 바란다. 황금 나무를 다시 또 보고 싶다면, 그건 추억일까 미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