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다시 생산과 노동을 말하다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는 ‘야생적’ 정치철학
생산과 노동은 일상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현대 이론,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이론들에서조차 생산과 노동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의 웃자람 아래 자취를 감췄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결같이 그 ‘단순한 사실들’에 천착한 ‘별종’ 사상가였다. 어떤 학술 전통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적 사유로 새로운 정치의 길을 닦았다. 그러한 작업은 평생 학자나 지식인보다는 코뮤니스트로서 살고 기억되고자 했으며, ‘사악한 마에스트로’라 불리면서 온갖 정치적 고초에 시달린 네그리의 실천적 삶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이 책은 주권과 일자의 논리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네그리의 사상을 열 가지 키워드로 해설한다. 네그리 사상의 중추를 이루는 ‘공통적인 것’, 그 주체적 형상인 ‘다중’, 다중의 내재적 자기조직화인 ‘절대적 민주주의’ 등 네그리의 핵심 개념들을 살핀다. 유명한 ≪제국≫ 연작만으로는 온전히 알 수 없는 네그리 사유의 풍요와 깊이를 맛볼 수 있다.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시키려 하는 네그리에게서 사상의 진정한 힘을 발견해 보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2023)
이탈리아 파도바 태생의 혁명가이자 사상가. 1958년 파도바대학교에서 독일 역사주의와 헤겔의 국가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 정치학부 교수로 근무했다. 1960년대부터 오페라이스모와 아우토노미아 이론·운동을 전개했다. 1979년 알도 모로 수상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수감되었으나, 1983년 선거에 급진당 후보로 옥중 출마해 당선된 뒤 의원 면책 특권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알튀세르, 들뢰즈 등의 후원으로 파리8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다. 1997년 자진 귀국해 6년간의 수감과 연금 생활을 마치고 2003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 등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고 종합한 당대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주요 저서로 ≪마르크스 너머의 마르크스(Marx oltre Marx)≫, ≪야만적 별종(L’anomalia selvaggia)≫, ≪제헌권력/구성적 힘(Il Potere costituente)≫, ≪제국(Empire)≫, ≪다중(Multitude)≫, ≪공통체(Commonwealth)≫ 등이 있다.
200자평
야생적 사유와 코뮤니즘의 실천으로 새로운 정치의 길을 닦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사상을 해설한다. 네그리는 마르크스주의의 본질로 돌아가 생산과 노동의 문제를 깊이 사유했다. ‘공통적인 것’에 기초한 네그리의 작업은 주권과 일자의 논리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를 정초한다. ≪제국≫ 연작만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네그리 정치사상의 풍요에 흠뻑 빠져 보자.
지은이
윤영광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칸트와 푸코: 비판, 계몽, 주체의 재구성≫(2025)과 몇 권의 공저가 있고, 번역서로는 ≪공통체≫(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2014), ≪이제 모든 것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 제국에 저항하는 네그리의 정치철학≫(닉 다이어위데퍼드 외, 2010) 등이 있다.
차례
야만적 별종의 사악한 삶과 사상: 네그리 이후 네그리를 생각한다는 것
01 코뮤니즘과 마르크스주의
02 오페라이스모
03 자유의 우선성
04 정치존재론과 초과
05 공통적인 것
06 특이성
07 다중
08 삶정치적 생산
09 자본의 코뮤니즘
10 절대적 민주주의
책속으로
이론적 차원에서 네그리의 두 번째 별종성은, 마르크스의 공(功)이 “이데올로기의 웃자람 아래 가려졌던 단순한 사실들”을 규명한 데 있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말에서 그 ‘단순한 사실들’의 차원, 즉 생산과 노동의 문제에 대한 한결같은 천착이다. 이런 언급은 새삼스러울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그러한 천착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비판적 이론에서,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이론들에서조차 ‘단순한 사실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당연한 ‘오래된’ 유물론적 태도, 특히 ‘새로운’ 유물론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사라져 가는 과거”에 속하는 듯한 이론적 실천을 네그리의 별종성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런 현대 이론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네그리는 “탈마르크스주의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_“야만적 별종의 사악한 삶과 사상: 네그리 이후 네그리를 생각한다는 것” 중에서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도 아니고 공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단순하고 부정적이지만 이론적·실천적 중요성 면에서는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규정이다. 중세 공통체 파괴를 통한 시초 축적을 발판으로 출현한 근대와 자본주의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정치적·사회적 상상계의 유일한 지형으로 제시해 왔다. 사적인 것 아니면 공적인 것, 시장(자본) 아니면 국가라는 양자택일적 선택지가 정치적 상상을 제한하는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자본주의에 도전한 많은 근대의 혁명과 저항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변증법에 기초한 현 세계와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의 출발점이자 토대다. 요컨대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대립 너머에 존립한다.
_“05 공통적인 것” 중에서
공통적인 것이 정치적·사회적으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거짓) 대립을 넘어선 곳에 있다면, 철학적으로는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을 넘어선 곳에서 정립된다. 이는 다중이 무엇보다 정치적 주체로서 의도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동일성=정치적 능력, 비동일성=정치적 무능력이라는 양자택일의 논리를 벗어나는 데 다중 개념의 정치적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래 정치사상을 규정해 온 수적 구분, 즉 하나·소수·다수의 구분에 따라 이야기하자면 다중은 “하나이자 다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로 환원된 다수가 아니라 다수인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 다중은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므로 동일성 그 자체도, 차이 그 자체도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이 ‘하나이자 다수임’의 논리를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다중은 전통적인 정치철학적 수(數) 관념과 논리를 훼손하는 이름이다.
_“07 다중” 중에서
자본의 생산이 공통적인 것에 기초한다면, 잉여 가치의 원천 역시 공통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분석했듯 다양한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의 지식과 지성이 산출하는 가치를 포획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소셜미디어들 역시 사람들의 사회적 연결과 소통에서 발생하는 가치를 포획한다. 현대의 석유로 상찬되는 데이터의 가치 뒤에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지성, 사회적 정동, 사회적 생산이 낳는 부가 자리하고 있다. 모든 것을 바꿀 것처럼 이야기되는 인공지능, 그중에서도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s)은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공통체 중 하나인 언어를 가치 추출 메커니즘에 포섭하는 장치다.
_“09 자본의 코뮤니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