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 개설
김민수가 옮긴 니콜라이 크루솁스키(Николай В. Крушевский)의 <<언어학 개설(Очерк науки о языке)>>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
문을 열지만 눈은 뜬다. 문을 뜨지 않고 눈을 열지 않는 이유는 문과 열다, 눈과 뜨다가 연결되어 기억되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이유는 마음과 말, 말과 단어, 단어와 문장이 서로 물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보두앵 드 쿠르트네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언어 현상도 다른 존재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학술적인 의미에서 ‘알려진 법칙들’을 따른다는 굳은 신념과 언젠가는 그 법칙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 있는 언어를 연구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 겸손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말한다면, 나는 점차 어떤 언어 이론에 도달했다.
≪언어학 개설≫, 니콜라이 크루솁스키 지음, 김민수 옮김, 26쪽.
크루솁스키가 말한 ‘알려진 법칙’이란 무엇인가?
자연법칙이다. 그가 밝히려 한 언어 현상의 법칙도 자연법칙처럼 예외나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해 그렇게 엄격한 법칙을 추구한 사람은 그가 처음인가?
헤르만 파울 같은 독일의 젊은 문법학자들이 비교언어학 방법으로 그런 시도를 했다. 크루솁스키도 파울의 1880년판 ≪언어사의 원리≫를 여러 차례 인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단순한 경험적 비교 방법은 오류로 귀결된다고 비판했다.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음성, 형태 단위, 단어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일반 조건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단순한 경험 비교로는 충분치 않다는 주장이다. 단계마다 확립된 음성 법칙, 형태 법칙에 근거한 연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크루솁스키의 방법론은 무엇인가?
언어 법칙을 두가지로 나누었다. 언어의 일반 속성을 규정하는 정태 법칙과 언어 변화를 규정하는 동태 법칙이다.
그가 정의한 언어의 일반 속성은 무엇인가?
모든 음성은 동일한 음향, 생리 조건에서 동일 시간대에 동일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내 음성이 다른 사람의 음성과 같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음성을 발음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발음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특정 개인의 발음 문제는 개인적인 결함일 뿐이다. 그것은 언어에 대해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 것 때문에 법칙에 예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이 크루솁스키의 태도다.
동태 법칙이란 무엇을 말하나?
음성이나 음성 체계 또는 음성 결합체가 일련의 변화 과정에서 단일성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정태 법칙에 기반을 둘 때만 이 단일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음성 법칙의 단일성이란 무엇인가?
특정 언어의 한 시기에 우리가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모든 음성 결합체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음성 결합체뿐이다. 이 현상을 음성 법칙의 일차 단일성이라 한다.
음성의 변화는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인가?
개별적인 음성 법칙 작용의 결과는 미미하다. 그러나 법칙 자체는 오랜 세월 작용한다. 미미한 변화가 축적되면 거대한 차이가 나타난다. 비유하자면 ‘음성 법칙들의 거대한 퇴적층’을 만나게 된다.
한 음성의 다양한 조음은 어떻게 단일성을 확보하는가?
근육 감각이나 음향 감각을 통해 이전 조음을 기억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 크지 않은 조음상의 차이는 하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런 다양한 조음은 힘을 아끼거나 조음을 단순화하려는 인체의 무의식적인 노력으로 점차 변할 수 있다.
단어도 무의식적으로 익히고 사용하는 것인가?
우리는 머릿속에 낱낱의 단위로 단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 형태와 계열 형태로 동시에 저장한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단어를 직접 생각해 내지 않아도 되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을 생성할 수도 있다.
체계 형태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단어가 유사성에 따른 연상 고리로 다른 단어와 연결된다는 뜻이다. 형태나 음성, 구조와 같은 외적인 요소뿐 아니라 기호 의미 같은 내적인 요소로도 유사성을 확보할 수 있다.
계열 형태는 우리 행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는 흔히 어떤 단어를 특정 단어와 함께 더 자주 사용하곤 한다. 습관인데 이것이 바로 계열 형태의 행동 사례다. 이런 현상은 인접성에 따른 연상이라는 심리 법칙에서 비롯된다.
크루솁스키는 언제부터 학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나?
그가 속한 카잔학파의 이론이 현대 구조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부터다. 그가 주장한 ‘조음 기억을 통한 음성적 단일성’은 소쉬르가 제시한 ‘음소’라는 개념에, ‘인접성과 유사성에 따른 연상’은 ‘통합 관계와 계열 관계’에 상응한다.
그는 이 책을 언제 썼나?
32세 때인 1883년에 박사 학위 논문으로 발표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민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HK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