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선 초판본
이연의가 엮은 ≪초판본 박두진 시선≫
박두진이 돌을 쫓은 까닭은?
그에게 수석은 태초의 기억이고 자연사와 인간사의 응축이다. 신과 역사가 빚은 자연의 시다. 실존과 수용, 견딤과 기다림의 산물, 태양은 돌이 되고 세계의 숙명은 이곳에 있었다.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초판본 박두진 시선≫, 이연의 엮음, 3∼4쪽
해가 솟으면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나?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새날이 온다.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애뙤고 고은 날’이 시작된다.
자연물인 해에게 “솟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가?
뜨거운 의지와 간절한 염원이다. 신은 ‘빛이 있으라’고 명했다.
시인이 신인가?
시인은 말을 창조한다. 언어의 왕이다.
무엇을 위한 명령인가?
참되고 영원한 이데아가 지금 바로 이곳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새날을 열기 위한 최초의 명령이다.
어떤 새날인가?
8·15 해방을 맞았다. 시대의 어둠을 걷고 새 역사를 맞을 때다.
해가 뜨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해의 품으로>에서 박두진은 이글대며 솟아오른 해를 직시하고 자신의 발걸음으로 직접 해에게 가야 한다고 말한다. 수동적 기다림만으로는 역사가 진행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에게 갈 수 있나?
가슴에 해를 품어야 한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해가 있어야 추위에도, 어둠에도 굴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가슴에 품은 해는 어떤 해인가?
솟구치는 혼이다. 어떤 것에도 훼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불멸의 생명이자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어둠과 죽음을 이기고 빛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원동력이다.
박두진에게 해란 무엇인가?
시 세계의 골격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해의 빛, 해의 열, 해의 생명력, 해의 불멸성, 해의 모든 것이 인간에게 주는 영감을 그는 자신의 시의 근간으로 삼았다.
왜 하필 해를 보았나?
해는 모든 생명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은총의 상징이다. 끊임없는 신생과 회복의 에너지다. 우주 질서의 구심점이고 불멸하는 절대 실체다. 생명과 사랑, 절대 진리와 영원을 포괄하는 복합적 상징이다.
해에서 신을 본 것인가?
신의 언어는 자연에 숨어 있다. 인간은 자연을 통해 신의 음성을 듣는다. 그 기호를 해독해 인간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 시인의 일이다.
청록파 시인이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눈을 돌린 계기는 무엇인가?
6·25다. 민족의 시련을 인류 악, 인간 악, 원죄 의식에까지 몰고 갔다.
악과 원죄 의식의 끝은 어디인가?
악과 원죄를 초극하고 벗어나는 계기의 출발이다.
그의 시에서 원죄의 초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6·25의 비극 앞에서 민족의 속죄를 위해 피땀으로 통회한 것이 두 번째 시집 ≪오도≫다. ≪거미와 성좌≫에는 4·19 혁명과 민족적 분노를, ≪인간 밀림≫과 ≪하얀 날개≫에는 5·16 전후의 시대적 고뇌를 담았다. 이어지는 ≪고산 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은 자신이 속한 시대 속에서 영원을 향해 전진하는 시인의 고독을 다루었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본질을 탐구했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돌아선 그의 여정은 어디로 나아가나?
수석시를 통해 자연과 인간과 신의 세계가 하나로 승화된다. 기독교 신앙과 인간적 삶과 자연의 세계가 하나로 통합을 이룬 것이다.
수석은 돌인데 어떻게 자연과 인간과 신의 합일점이 될 수 있나?
시인에게 수석은 태초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우주 역사의 집합체이고 자연사와 인간사의 집적이며 응축이다. 이것은 신의 창조와 역사적 변형이 어우러져 빚어진 예술 형상이며 자연의 시다.
신과 우주, 자연과 역사의 변증법을 말하는가?
그렇다. 실존과 수용, 견딤과 기다림이라는 피조 세계의 숙명을 내포하는 하나의 표상이다.
그에게 시란 무엇인가?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삶의 한 형태다. 신에게 바치는 찬양이자 기도이며 영혼의 정수를 담은 최고의 제사다.
당신은 누군가?
이연의다. 경희대학교 객원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