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사
이명자가 쓴 <<북한영화사>>
영화가 말하는 북한의 징후
군이 앞장선 이 나라의 현 주소는 강고한 보수주의다. 그런데 영화는 개혁과 변화를 바라본다. 과거와 미래의 힘이 경합한다. 충돌이 감지된다. 영화는 신문보다 빠르다.
분단기 동안 남한에서 자본주의와 국가정책, 검열과 대중문화에 적응하며 영화사가 전개돼 온 것처럼 북한에서도 사회주의와 문예정책, 인민대중의 변화하는 요구들에 맞추어 영화사가 전개되어 왔다. 문예정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려는 작가의 노력이 있었고, 더 풍부한 화면을 촬영하려는 연출가와 촬영감독의 고민이 있었으며, 자기가 맡은 배역을 사실감 있게 해보려는 영화배우들의 성실함이 있었다. 그렇게 제작된 영화들은 영화정책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고민과 해결되지 못한 채 침전된 사회문화적 문제들을 담아내기도 한다.
‘들어가며’, <<북한영화사>>, vi
최근 북한의 영화 사정은 어떤가?
2009년 화폐개혁 실패와 김정일 사망으로 위축되었다. 북한 사회문화 전체가 보수의 경향을 보인다. 다른 한편에선 개혁과 변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 대립되는 문화적 힘들이 경합하는 형세다. 이런 사정이 영화에서 징후적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왜 북한영화를 연구하나?
북한영화는 영화 전공자가 아니라 정치학이나 사회학 전공자들이 연구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만 남고 대중문화로서 영화적 특징은 간과되었다. 북한영화도 영화로 다루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북한영화 연구는 어디까지 와 있나?
연구 자체가 안 되었다. 무관심과 근거 없는 우월주의가 팽배하다. 북한영화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찾기 힘들다.
북한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뭔가?
사회주의 사회의 영화다. 상업적 이익보다 작품의 의미와 필요, 당위가 우선된다. 문예정책의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해 연출가의 결정이 제한된다.
이 책 <<북한영화사>>는 무엇을 말하나?
1945년부터 2006년까지의 북한 영화사를 기록했다. 북한영화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각 시기별 영화사적 사건과 작품을 담았다.
북한영화사의 시기를 어떻게 나눴나?
북한의 문예정책을 고려했다. 1967년까지는 북한의 문예사를 적용하고 그 이후는 영화제작 경향에 따라 나누었다.
1967년은 어떤 해인가?
그때까지는 카프와 항일혁명전통이 모두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이후 김일성 유일사상이 강화되면서 항일혁명전통만 정통으로 인정하고 주체문예이론을 창작 방법으로 선언했다.
카프, 곧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
1945년 10월 1일 재결성되고 곧 이어 11월 영화부가 만들어졌다. <<매일신보>>는 이를 두고 “35년 일본 관헌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말미암아 해산된 과거의 동맹원들은 일치단결하여 동맹재건의 봉화를 높이 들고 일어섰다”고 전했다.
일제 강점기에 카프의 영화는 무엇이었나?
좌파 경향의 영화를 만들었다. <유랑>, <혼가>, <화륜>, <암로>, <지하촌> 이 카프 계열의 영화다. <지하촌>은 일제의 검열 때문에 상영되지 못했다.
카프 영화는 조선영화동맹으로 확대되는 것인가?
민족문화건설 역량이 분산될 수 있다는 우려로 카프 산하 영화부(프로영맹)와 조선영화건설본부(영건)가 합쳐 1945년 12월 16일 조선영화동맹이 출발했다. 조선영화동맹의 뿌리는 카프영화운동이다. 1949년 미군정이 공산주의 활동을 금지해 많은 영화인들이 월북하며 영맹은 해체된다.
북한영화의 본격 출발은 언제인가?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를 건립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남북을 통틀어 최초의 전문 촬영소였다. 1949년에는 최초의 극영화 <내 고향>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 북한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북한영화의 토대 형성기다. 두 편의 극영화 <내 고향>과 <용광로>는 북한 사회가 항일정신과 노동자계급성을 중심으로 구성될 것임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누가 대표 배우였는가?
월북 영화인들이 활발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만인의 연인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문예봉이 거의 모든 영화에 등장한다. 남자배우는 유원준이다. 둘은 북한의 첫 극영화 <내 고향>에서 연인 사이로 나온다.
1967년 이후 북한영화는 무엇이 달라졌나?
유일체제가 등장하고 창작방법이 교조화되었다. 최초의 수령형상영화 <누리에 붙는 불>이 등장했다. 3대 혁명영화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 만들어졌다.
김정일이 영화를 주도하던 시기인가?
그가 나서면서 많은 관심과 제작비를 지원받아 영화가 발전한다. 장르도 다양해졌다.
<<영화예술론>>은 김정일이 쓴 것인가?
1973년 출간됐다. 북한의 1차 문예혁명을 이끌고 문학예술 이론을 총괄 정리한 책이다. 김정일이 문예를 장악하고 주체화를 이루기 위해 만든 도구로 평가된다.
김정일시대 북한영화는 어떤 모습이었나?
실리를 중시하는 정책의 영향으로 재미, 성과, 대중성을 갖춘 영화가 제작되었다. 소위 선군영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왔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명자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