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선 초판본
氷河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水
平
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 소리
파도 소리 붓어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 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 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 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 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갈이 스쳐 갈 바람결이어
생활이 주고 간 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 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心臟도 氷河 되어
남은 피 한 천년 녹아
철철철 흘리고 싶다.
≪초판본 신석정 시선≫, 권선영 엮음, 83~84쪽
꿈 많은 청춘은 벅찼다.
뚝뚝 지는 동백꽃에게도 눈물이 뜨거웠다.
오늘 다시 동백꽃은 지는데, 생활이야 뭐 그리 서러울까,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