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원 동화선집
손기원이 짓고 진선희가 해설한 ≪손기원 동화선집≫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법
진정성은 공기다.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우린 죽은 것이다. 손기원이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이유가 그렇다. 아픔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당신, 너무 심한 게 아니야?”
“이것이 우리 들고양이들의 운명인 걸 어쩌겠나.”
“그래도 너무 잔인해!”
새끼들이 모두 떠난 날 흰고는 밤새 울었습니다. 며칠 후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갑자기 흰고가 도시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야켓은 말리지 않았습니다.
“여긴 너무 답답해. 그리고 아무리 들고양이의 법칙이라지만 새끼조차 쫓아 버리는 당신이 너무 잔인해. 내가 날고기를 먹을 만큼 잔인하게 변한 것을 알고는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해. 나는 당신과 달라!”
“아니야. 당신도 원래는 나와 같은 들짐승에 불과했어. 다만 어느 순간 당신 조상이 인간에 의해 길들여졌을 뿐이야.”
≪손기원 동화선집≫, <흰고를 사랑한 야켓>, 손기원 지음, 진선희 해설, 166~167쪽
흰고와 야켓은 흰고양이와 들고양이를 말하는가?
흰고는 ‘애완동물’이었다. 주인 할머니가 죽은 뒤 새 집주인은 흰고를 그물에 넣어 내다 버린다. 길고양이 야켓이 그물을 물어뜯어 구해 준다.
애완동물이 길에서 살 수 있나?
처음에는 야켓이 구워다 주는 고기를 먹는다. 차츰 날고기와 진흙 목욕에 익숙해진다.
길에 익숙해진 흰고가 왜 도시로 떠나나?
야켓이 새끼들을 독립시키기 위해 물어다 먼 곳에 두고 오자 야속하고 섭섭한 마음에 도시로 간다.
도시로 간 흰고는 어떻게 되는가?
아무도 반겨 주지 않는 도시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다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도시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한때 익숙했던 도시의 삶은 인간에 의한 길들임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야켓의 진정성을 깨닫는다.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진정한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진정한 사랑을 본 것인가?
배려와 기다림의 고통을 통해서만 사랑은 진정해진다. 야켓은 흰고에게 고기를 구워 주기 위해 자신의 발을 데기도 한다. 그리고 도시로 간 흰고를 묵묵히 기다린다.
사랑이 진정해지면 무엇이 나타나는가?
삶의 성숙과 행복에 대한 깨달음이 열매 맺는다.
언제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사랑은 영그는가?
<빨간 장갑>에서 준이는 꿈과 현실을 오가며 애틋하게 죽은 형을 그리워하고 누나의 귀환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고통과 안타까움을 동반한다. <오디새의 노래>와 <동구 밖 미루나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애타게 아들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손자에게 대를 이어 지속된다. 손자가 뽕나무에 명주실을 걸거나 미루나무를 다시 심어 정성껏 키움으로써 삶과 죽음을 초월한 기다림이 유지된다.
사랑은 오직 기다림인가?
설마 그렇겠는가? 다른 사랑을 낳으며 우주 만물 간에 계속 확장되어 가는 사랑도 있다.
확장되는 사랑은 어떤 얼굴인가?
<산새와 병사>에서 산새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병사의 목숨을 구한다. <곰바위>에서 곰은 분이의 친절에 감동해 분이를 구한다.
동물 보은 화소인가?
그렇다. 착한 사람의 도움을 받은 동물이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는 전통 설화에 자주 등장한다.
당신 작품에서 전통 설화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곰바위>에는 인신 제물 화소를 활용했다. 호랑이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해마다 마을의 여자아이를 제물로 바친다. <청벽사 돌아이>에는 안수정등(岸樹井藤) 설화를 끌어왔다.
안수정등 설화?
절벽의 나무와 우물의 칡넝쿨이란 뜻이다.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 쫓긴다. 때마침 우물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드리운 칡넝쿨에 매달려 숨는다. 그런데 밑에서는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린다. 위에서는 흰 쥐 검은 쥐가 칡넝쿨을 쏠고 있다. 덩굴에는 벌집이 달려있다. 꿀이 똑똑 떨어진다. 남자는 꿀맛을 즐긴다.
옛이야기는 당신의 동화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전래 이야기는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민족 혼의 유전자라고 할까? 공감을 구하고 이야기체 텍스트의 구조를 견고하게 만든다.
진선희는 당신 동화에서 “삶에 대한 수행과 성찰 과정”을 본다고 했다. 그런가?
그렇다. 한때는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죽음은 결국 삶의 성찰로 극복될 수 있음을 깨닫고 삶을 더욱 진지하게 보게 되었다.
수행과 성찰의 목적은 뭔가?
삶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태도만 있어도 함께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성이 없으면 배려, 웃음, 위안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내 작품도 마찬가지다.
진정성을 어떻게 찾는가?
더 아파야 하고 괴로워하며 나를 죽여 가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에스프리다. 내가 사는 이유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어느 추운 겨울날, 바람막이도 없는 좌판에 앉아 남루한 아가씨가 김밥 한 줄을 앞에 두고 공짜로 주는 시래기 국물을 훌훌 들이켜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수저를 든 그 아가씨의 손이 여리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몇 걸음 가다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아가씨는 그 자리에 없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문제는 삶의 진정성이었다.
당신이 글을 쓰는 이유는 뭔가?
삶 자체에 대한 근원적 해답을 찾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손기원이다. 동화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