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순 동화선집 초판본
어른을 위한 어린이날 특집 2. 지금 여기를 사는 주인공들
장욱순이 짓고 박혜숙이 엮은 ≪장욱순 동화선집≫
동화에서 시의 환상
아동문학이지만 심리 갈등은 깊다. 욕망의 행동을 추적하는 양심의 질책은 매섭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불안을 매듭짓는 것은 부활을 소망하는 아이들의 용기다. 지금 여기의 삶이 다시 시작된다.
태홍이는 조심스럽게 그림의 변소 문을 열어 보았읍니다. 거기에는 제가 빨간 분필로 낙서를 한 것이 그대로 씌어 있었읍니다. 그러자, 고개를 쳐들어보니 그 색시는 금방 간 곳이 없고, 호수의 파란 물결만 출렁거렸읍니다. 다시 그 변소를 쳐다보자 금방 그 글씨들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여 드디어는 시뻘건 뱀이 되어서 입을 벌리고 대들었읍니다. 태홍이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정신없이 도망을 하다가 호수 속으로 텀벙 빠지고 말았읍니다.
<빨간 상자>, ≪장욱순 동화선집≫, 장욱순 지음, 박혜숙 엮음, 11쪽(표기는 ≪아동문학≫ 1974년 1월호를 따랐습니다.)
꿈인가?
말썽쟁이 태홍이는 봉수의 물건을 던져서 유리창을 깨뜨리고서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벌세운 선생님에게 분한 마음을 품는다. 선생님을 골탕 먹이려 화장실에 빨간 분필로 낙서를 한 뒤 꿈을 꾼다.
뭐라고 썼는가?
봉수의 글씨체로 ‘3의 3은 조정란 선생님에게 배우기 싫습니다’라고 썼다.
3의 3이 뭔가?
3학년 3반이다.
그러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는가?
그렇지가 않다.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고, 영 평안하지가 않고, 자리에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고, 공연히 머리가 아프고 속이 뒤틀린다.”
시뻘건 뱀은 무엇을 뜻하는가?
‘빨강’은 불안과 긴장, 공포, 위험성을 연상시킨다. ‘뱀’은 과거를 벗어 던지고 새 삶을 여는 생명의 상징이다. ‘빨간 뱀’은 화장실에 낙서한 죄를 은폐하고 있는 태홍이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한다.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소망이 발화된 것이기도 하다.
불안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낙서 때문에 봉수가 누명을 쓴다. 이틀간 학교를 안 나가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태홍이는 봉수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사과한다. 태홍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봉수와 맞잡은 손에서는 땀이 흐른다.
이런 식의 시적 환상은 어떤 효과가 있는가?
‘빨간 뱀’이란 시각 이미지로 환상 세계를 현실보다 더 선명하게 제시한다.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심층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동화라는 장르 미학이 잘 나타난다.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 곧 <미운 동그라미>의 빨간 동그라미도 같은 기능인가?
현이의 죄의식을 가시화한다. 선생님은 채점을 할 때 맞으면 빨간 동그라미를, 틀리면 파란 동그라미를 매긴다. 친구 석이의 답을 보고 적은 어느 날 이후 빨간 동그라미가 현이를 괴롭힌다.
어떻게 괴롭히는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도, 눈을 꼭 감아도 자꾸 떠오른다. 현이가 먹으려던 ‘빨간 사과’는 ‘파란 동그라미’가 되고 ‘파란 동그라미’는 다시 ‘파란 사과’가 되어 따라다닌다. “파란 사과를 바작바작 깨물어 먹었다”는 죄의식을 털어 내고 싶은 소망의 간절함을 나타낸다.
죄의식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하는가?
시험지의 마지막 빨간 동그라미 위에 파란색으로 진한 동그라미를 덧그림으로써 잘못을 인정한다. 현이 시험지에서 빠져나온 미운 빨간 동그라미는 또르르 굴러가 석이 시험지의 맨 끝 번호에 가서 찰싹 올라앉는다. 그제야 현이는 늘어졌던 어깨를 펴며 씽긋 웃는다.
장욱순은 시적 환상으로 무엇을 이루었는가?
1960년대 전후는 교육동화와 생활동화가 마구 휩쓸던 시기다. 장욱순은 이런 때 본격동화 운동에 동참해 시적 환상 기법을 통한 품격 높은 동화를 창작했다.
그의 또 다른 키워드는 무엇인가?
휴머니즘이다. 말 그대로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사상적·정신적 태도나 세계관이다. 그 본질은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시적 환상이란 기법도 휴머니즘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그려 내기 위한 것이다.
어디에서 그의 휴머니즘을 볼 수 있는가?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헤쳐 나가는 어린이가 등장한다.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밀도 높게 형상화함으로써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삶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이들 옆에 있는 온기와 배려가 넘치는 주변 인물을 보여 준다.
지금, 여기를 사는 작품 속 인물들은 누구인가?
월석을 따겠다는 목표를 이룬 <달 따는 소년들>의 두 주인공,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가판대 점원이 된 <아바마마>의 명훈이다. <달 따는 소년들>에 나오는 ‘백 박사’나 <아바마마>에 등장하는 똘똘이 엄마, 옆집 할머니와 가판대 할머니, 명훈이의 친구들은 곤경에 처한 주인공을 돕는 든든한 조력자다.
장욱순은 왜 현대 아동문학사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는가?
애석한 일이다. 1984년 동화 <아바마마>를 남기고 절필함으로써 아동문학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채 잊혀 갔다.
절필 뒤의 행적은?
충북 괴산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독서와 서예로 주로 시간을 보냈다. 2011년, 78세를 일기로 “그동안 폐 많이 끼치고 사랑 많이 받고 떠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시신은 기증했다.
당신은 누군가?
박혜숙이다. 동화를 창작하며 아동문학을 평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