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희 동화선집
어른을 위한 어린이날 특집 3. 슬픔과 고통의 강을 건너
이규희가 짓고 전명희가 해설한 ≪이규희 동화선집≫
찬란한 꽃의 역사
봄이 되기 전에 겨울이 있었다. 차고 어둡고 황량했다. 겨울이 있기 전에 가을이 있었다. 잎은 떨어지고 줄기는 말라 부서졌다. 그때 씨가 땅에 떨어졌다. 여름을 기억했다.
“아니, 당신은, 여태 태극나비가 되고 싶다던 어머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소! 바로 이렇게 태극나비가 되어 찾아오시지 않았소! 이젠 자유롭게 정말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게 해 드려야 하오.”
아빠가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리고 집 안을 훨훨 날아다니던 태극나비가 창문을 넘어 날아가자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엄마와 보람이도 얼른 그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
태극나비는 이제 마악 하늘로 마당을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이, 안녕, 안녕!”
보람이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자 태극나비는 한 점 별이 되려는 듯 먼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태극나비가 완전히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어느 틈에 새벽별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규희 동화선집≫, <태극나비>, 이규희 지음, 전명희 해설, 59∼60쪽
할머니가 태극나비라니,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인가?
아빠가 어릴 적이었다.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다. 할머니는 험한 세상에서 벗어나 태극나비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아빠는 정말 태극나비가 할머니라고 믿는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에게는 간절한 믿음이었다.
태극나비는 어떻게 만난 것인가?
아빠는 나비 연구자가 되었다. 몇십 년 동안 태극나비를 찾아다녔다. 딸 보람이와 함께 간 채집 여행에서 태극나비를 발견한다.
이 작품에서 태극나비는 무엇인가?
평론가 전명희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매우 상징적인 매개물”이라고 했다.
무엇을 상징하는 매개물인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나비에게서 엿보이는 천상의 삶과 기성세대들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인간성이 희생된 지상의 모습이 대조된다.
시간 축에서는 어떤 상징을 읽을 수 있는가?
날아가 버린 나비는 다시 볼 수 없다. 태극나비의 비상은 부모의 죽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자기 인식의 경과이고 성장의 뚜렷한 징표다.
아빠는 성장한 것인가?
그렇다. 평생을 찾아온 태극나비를 자유롭게 풀어 준다. 그동안 자신을 잠식해 온 슬픔에서 자유로워진다.
<사라진 출렁다리>, <연꽃등>에서도 ‘가족’은 중요하다.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따뜻함이다. 동화 속 인물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살고 성장하기를 바랐다.
‘가족’을 잇는 당신의 소재는 무엇인가?
역사다. 선집에 실린 동화 여덟 편 중 여섯 편이 한국전쟁이나 일제강점기, 신라 말의 이야기다. 역사로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픈 역사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는가?
<두 나무 이야기>는 나무의 입을 빌려 간접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과 저항을 이야기했다. <금붕어 할머니>는 순수한 일본 아이인 아이짱의 시선을 통해 위안부로 일본에 끌려와 조국에 돌아갈 수도 없던 할머니의 안타까운 삶을 그렸다.
등단작 <연꽃등>은 어떻게 썼나?
1978년 어느 날, ≪중앙일보≫에서 ‘소년중앙문학상’ 공고를 보았다. 강원도 태백 황지 연화산의 조그만 암자에서 혼자 사방치기를 하던 아이가 떠올랐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에겐 엄마가 없을 거야. 그러니 내가 동화 속에서라도 엄마를 만나게 해 주자.’
왜 하필 그 아이가 떠올랐나?
나는 동화적인 상상력이 없었다. 그러나 연화산에서 까까머리 아이를 본 순간 갑자기 내 안에서 동화적 상상력의 우물이 샘솟았다. 동화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 아이는 엄마를 만났는가?
부모가 없는 미루는 진성사라는 절에서 자란다. 엄마는 미루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부처님에게 엄마를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던 미루는 아빠가 보낸 새엄마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유년 시절,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노름과 방탕한 생활로 우리 집 모든 재산이 사라졌다. 첩첩산중인 강원도 태백, 영월로 가게 됐다. 험한 산과 탄광촌, 동강, 단종 유적지라는 쓸쓸한 풍경 속에서 자랐다.
상실의 경험은 당신에게 무엇으로 남았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동화의 씨앗을 남겼다. 누더기 이불처럼 이리저리 덧대어 꿰맨 불행들이 동화를 쓰게 된 내게는 보물단지며 빛나는 보석이었다.
당신에게 동화는 뭔가?
오래된 친구다. 그 덕분에 슬픔과 고통의 강물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고 같은 길을 걷는 글동무를 만났고 내 작품 속에서 수없는 어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규희다. 동화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