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은 어디를 향하는가?
<특집> 416 커뮤니케이션 8. 416은 어디를 향하는가?
공동선에 대한 갈망
의견과 정보, 비난과 격려의 바다 위로 노란 리본이 떨어진다. 본분을 망각한 언론과 책임을 방기한 정부가 비운 자리에 시민의 공론이 쌓인다. 우리 모두의 갈망이 노란 꽃을 피운다.
SNS 연구 분야에서 416은 무엇인가?
희망과 좌절, 슬픔과 위로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키워드는 무엇인가?
혼란이다.
416에서 SNS는 무엇을 했는가?
의견을 말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잘못을 비난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아픔을 나눴다.
그것은 어디에 있었는가?
다양한 사회 상호작용의 한가운데 있었다.
무엇을 말했는가?
희생자의 아픔을 자신에게 투영하여 416의 내면 감성을 드러냈다. 슬픔을 말하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위정자를 원망했다. 한 명이라도 더 구조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말은 어떻게 교환되었는가?
말은 공유되었다. SNS의 특징이 ‘공유’ 기능이기 때문이다.
공유의 기능은 무엇인가?
공유를 통해 공감을 유도한다. 공유된 콘텐츠를 중심으로 다양한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는 다시 공유를 통해 확장된다.
누가 누구의 잘못을 비난했는가?
대중은 언론을 비난했고 정부를 비난했고 직접 책임자들을 비난했다. 비난은 공개되었다.
무엇을 비난했는가?
언론의 무분별한 취재 경쟁을 비난했다. 속보 욕심으로 인한 오보, 특종 욕심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언론의 오보와 사생활 침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언론은 416에 대한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다. 대중은 원인과 대책에 대한 냉정한 보도를 원했으나 언론은 본분에 집중하지 못했다.
또 누구를 비난했는가?
위정자의 자기 실속 챙기기에 대한 비난, 끝까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은 세월호 관계자들의 무책임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격려의 대상은 누구였는가?
대중이 희생자들을 격려했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와 희망을 전달했다.
아픔은 어떻게 나누어졌는가?
노란 리본이다. SNS 이용자들은 자신의 프로필 사진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공간은 희생자와 그 가족과 아픔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416에서 기존 언론과 SNS의 역할은 어떻게 나뉘고 또 공조했는가?
기존 언론은 416을 속보 경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SNS는 국민의 공감을 유발하는 소식과 콘텐츠의 매개 공간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공조는 찾을 수 없었다. 416에서 기존 언론과 SNS가 공조하기에 기존 언론의 한계가 너무 컸다.
우리 언론의 한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언론은 희생자들의 보호받을 권리와 배려받을 권리가 알 권리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저널리즘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성에 대한 배려다.
인간성의 중요성을 망각한 언론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사안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향후 방향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416 현장 모습에 집착했다. 공분을 자극하게 되었고 국민의 마음에 피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우리 언론이 왜 이런 짓을 했다고 보는가?
저널리즘의 사회적 책무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신성한 저널리즘이 상업적 저널리즘으로 변질되는 과정이 이번에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우리 언론의 한계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저널리즘의 미성숙이다. 재난 보도에 대한 교육이 있었을까? 재난 보도에서 지켜야 할 공통의 윤리 규약을 인식했을까?
언론인에 대한 재난 보도 교육이 없는가?
우리 언론의 416 보도는 그동안 재난 보도에 대한 교육과 재교육이 언론인들에게 실시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416의 유사 사례는 무엇인가?
천안함 사건이다. SNS를 통해 수많은 추측과 소문이 전달됐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천안함 사태의 특징은 뭔가?
정치 담론이 주도했다. 특정 목적을 가진 SNS 참여와 의견 지도자 중심의 소통 체계가 현저했다.
416의 특징은 뭔가?
공통의 사회 가치를 추구하며 누구나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했다는 점이 천안함과는 다르다. SNS가 대중의 사회적 소통 수단으로 외연을 넓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안에서 SNS 담론이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천안함은 이데올로기 가치가 내재되었기 때문에 좀 더 정치적인 성향을 띤 이용자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416은 가치중립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담론 형성에 참여하는 이용자는 우리 사회의 평범한 대중이다.
SNS에서 일어나는 모바일 추모 물결은 어떤 현상인가?
이곳에서는 서로의 심리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슬픔과 분노와 경험이 타인에게도 공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은 SNS를 이용해 개인의 단절감으로부터 벗어나 사회를 공감할 수 있고 그 공감의 규모와 강도는 점점 더 크고 깊어진다.
416의 공감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회 공동선의 실현이다.
416에서 SNS는 어떤 역기능을 드러냈는가?
거짓 정보와 헛소문이 확산돼도 검증할 시스템이 없다. 필터링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거짓 정보와 헛소문에 대해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두말할 나위 없이 SNS의 이용자, 우리의 책임이다. 편리한 기능을 악용하고 잘못된 정보에 현혹되는 것은 우리의 미성숙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면 SNS를 접하는 사람들도, SNS 정보를 대하는 언론도, SNS의 사회적 위상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SNS 문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되겠는가?
SNS 공간은 자정될 수 있다. 이용자들은 하나의 가치, 곧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향해 협동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416 연구의 방향은 무엇인가?
개인 내면의 심리 상태와 의견 표출이 사회 담론을 형성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사회 운동으로 확장되는 기제와 다이내믹을 밝혀내야 한다.
당신에게 416은 무엇인가?
동참이다.
황유선
황유선은 중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다. <<소셜 미디어 연구>>(2012), <<트위터에서의 뉴스 생산과 재생산>>(2011)과 같은 책을 함께 썼으며 “선택적 노출 행위를 통해 바라본 트위터 공간의 이념적 양극화”, “진보적 정치 성향과 정치 지식은 정치 대화를 촉진하는가?”, “Digital divide in social networking sites” 와 같은 논문을 썼다. 416을 통해 사회관계소통망이 언론과 어떻게 충돌하고 병존하며 확산되는가를 목격한다. 선한 의지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형성하는 길과 밝은 의지가 사회소통의 역기능을 가려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그에게 416은 혼돈이자 아픔이고 동참이자 격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