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논리학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에서부터 현대 수리논리학의 개척자 프레게(1848∼1925)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논리학사에서 서양 중세 후기(12∼14세기)에 비길 만한 전성기는 없었다. 1930년대 이후 현대 논리학의 조명 아래 지칭(suppositio), 귀결(consequentia), 역설(insolubilia) 등 중세 논리학의 여러 분야들이 속속 신비의 베일을 벗기 시작했으나 ‘토론에서의 의무’에 관한 논고들만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논고들에는 중세 논리학자들이 논리학의 다양한 분야들로부터 일궈 낸 성과들이 유감없이 반영되어 고도로 정교하고 비판적인 이론 체계가 담겨 있다. 당시 의무 토론의 용어와 규칙들은 논리와 철학은 물론이고 자연학, 의학, 법학, 신학 등 분야를 막론한 저술들 도처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에, 이 분야의 표준을 세운 월터 벌리의 《토론에서의 의무(Tractatus de obligationibus)》를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월터 벌리는 14세기 가장 저명한 논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토론에서의 의무》는 그의 대표 논저다. 이 책에서 벌리는 토론에서 질문하고 답변하는 참여자들이 일관성과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정립함으로써 향후 극도로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는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했다.
오늘날 순수 논리학과 응용 논리학의 괴리는 양자 모두에게 불필요한 재앙이 되어 왔다. 전자는 수학과 더불어 고도로 추상적인 형식 과학이고, 후자는 일반인이 실제 논쟁 상황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서 실용적 가치를 지니는 변승적/수사학적 기술이라고 이해한다면 괴리는 불가피하다. 중세 논리학의 토론의 의무 이론은 한편으로 과학의 논쟁적 측면을 일깨우는 동시에 일상생활에 이미 내재된 논리적 원리와 규칙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요설과 궤변이 횡행하는 폭력의 시대, 토론의 규칙을 수 세기에 걸쳐 숙고한 중세의 위대한 실험을 반추하는 일은 아직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절박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200자평
중세 논리학 의무 토론 분야의 표준을 세운 월터 벌리의 저서 《토론에서의 의무(Tractatus de obligationibus)》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다. 벌리는 이 책에서 토론에 참여하는 질문자와 답변자가 일관성과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정립함으로써 향후 극도로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는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했다. 한국논리학회 회장, 한국분석철학회 회장, 한국중세철학회 부회장을 지낸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박우석 박사가 라틴어 원전을 바로 번역했다.
지은이
월터 벌리(Walter Burley, 1274/1275∼1344?)
세속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단순명료한 박사(Doctor planus et perspicuus)’라 불렸다. 그는 14세기 전반부의 가장 뛰어난 논리학자이자 자연학자였다. 거의 80편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 가운데 대략 60편 가량이 보존되었는데, 대부분은 논리학과 자연학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신학과 실천철학에 관한 것이다. 논리학의 전 분야에서 중요한 저술을 남겼고, 특히 《토론에서의 의무》 등은 해당되는 세부 분야에서 표준을 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논리학 분야의 벌리의 또 다른 대표작은 《논리학의 순수성에 관하여(De puritate artis logicae)》다. 벌리는 이 책에서 온갖 종류의 귀결들을 망라하는 논증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중세 논리학의 전 분야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걸출한 업적을 이루었다.
벌리는 논리학 못지않게 자연학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가 남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해서들은 이 분야 주요 저작으로 손꼽힌다. 벌리는 또한 옥스퍼드 계산가 중 한 명으로 중요하게 거론된다. 중세 논리학과 중세 자연학 사이의 상호작용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17세기 근대 과학 혁명을 부각하면서 중세 과학과 근대 과학 사이의 단절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오랜 잘못을 교정하는 첫걸음에 해당한다. 그런 관점에서 갈릴레이 등 17세기 근대 과학 혁명의 개척자들의 업적의 배경이 되고 선취했다고까지 칭송되는 옥스퍼드 계산가 전통과 벌리가 논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벌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오컴ᐨ벌리 논쟁’이다. 이 논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수록 그 전선이 논리학, 자연학, 그리고 형이상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과 윤리학으로까지 확대되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벌리의 방대한 저작 목록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니코마코스윤리학》에 대한 주해서가 포함되어 있다.
옮긴이
박우석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버펄로)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4반세기 동안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디지털 인문사회과학부 명예교수다. 한국논리학회 회장, 한국분석철학회 회장, 한국바둑학회 회장, 한국중세철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스프링어(Springer)출판사의 총서 “SAPERE(Studies in Applied Philosophy, Epistemology and Rational Ethics)”의 자문위원이고, 국제학술지 《Al-Mukhatabat: A Trilingual Journal for Logic, Epistemology and Analytical Philosophy》의 편집위원이다. 저서로 《Philosophy’s Loss of Logic to Mathematics》(2018), 《Abduction in Context》(2016), 《중세철학의 유혹》(1997), 《알프레트 타르스키》(2024), 《논리학과 인공지능 바둑》(2024)이 있고, 국내외 유수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번역한 책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논리학》(2023),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실재론적 수학철학: 양과 구조의 과학으로서의 수학》(2022)이 있다.
차례
0. 들어가며
1. 의미 부여하기
a. 절대적 의미 부여하기에 관하여
b. 의존적 의미 부여하기
c. 동의어에 관하여
2. 요청하기에 관하여
3. 설정하기에 관하여
가능(한 것) 설정하기에 관하여
a. 규칙들
b. 궤변을 구성하는 방법
c. 연언적 설정하기에 관하여
d. 불확정적 설정하기에 관하여
e. 의존적 설정하기에 관하여
f. 종료(Cadenti) 설정하기에 관하여
g. 재생(Renascenti) 설정하기에 관하여
h. 대리(Vicaria) 설정하기에 관하여
불가능(한 것의) 설정하기에 관하여
4. 반설정하기에 관하여
a. 규칙들
b. 궤변을 구성하는 방법에 관하여
c. 연언적 반설정하기에 관하여
d. 선언적 반설정하기에 관하여
5. 의심하기에 관하여
a. 규칙들
b.유사성과 차이에 관하여
c. 연언적 의심에 관하여
d. 선언적 의심하기에 관하여
6. 참으로 하기에 관하여
부록 / 중세의 토론 논리 개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참고문헌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우리가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토론에서의] 의무가 무엇인가다. 하나의 의무는 어떤 특정 조건에 따라 [쟁점이 되고 있는] 진술 가능한 것에 속하는 하나의 접두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속박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의무’라고 불린다.
2.
첫째, 우리는 가능 설정하기를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 우선 이런 종류의 설정하기에서 설정되어야만 하는 바를 고찰해야 한다. 가능 설정하기의 사례에서 설정되어야만 하는 바는 거짓인 어떤 우연적 명제, 참인 어떤 불확실한 명제, 그리고 때로는 참으로 알려진 참인 명제−예를 들어, 때때로 참으로 알려진 어떤 진리를 부인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 맞서−다. 왜냐하면 [심지어] 참으로 알려진 진리도 항상 참이라고 주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의무 지워질 때를 제외하고서는 불가능한 것은 결코 시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것은 심지어 오직 가능한 것만이 설정되었을 때에조차 시인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이전에 그것이 참이었을 때 시인되었던 어떤 명제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 불가능한 것이 의무 지워지는 것은 바로 이전에 시인되었던 것이 의무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명제가 이전에 잘못 시인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이 시인되었을 때 그것은 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