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지 북살롱 ≪논어≫강좌
지만지북살롱이 두 번째 마당을 엽니다.
첫 강좌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더 알차게 준비했습니다.
지만지북살롱은 함께 고전을 읽고 오늘을 읽고 우리를 읽는 자리입니다.
古典今讀의 첫 텍스트로 ≪논어≫를 선택했던 이윤호 강사가
강좌를 마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소개합니다.
인문학이란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무엇
– 지만지북살롱 ≪논어≫ 강좌를 마치고
젊음의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던 시절, 그리하여 인생이란 ‘천둥처럼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우는 것’ 같았다고 생각했던 시절, 세상은 눈을 감으면 사라지고, 눈을 뜨면 기껏 내 눈만한 곳이었다. 세상에 대한 모든 호기심으로 왕성했으며, 보고 익히는 것마다 다 빨아들였다. 그랬다. 어쩌면 오기와 편견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 고은이 자신의 인생의 9할이 바람이었다면 나는 한 7할쯤은 세상에 대한 콤플렉스와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80년대. 그 시절에 대학이라는, 다소 낭만적이면서도 위험 가득한 캠퍼스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겠지만, 나 역시 귀신에 홀리듯이 이른바 불온서적(?)들을 탐닉했다. 대학가 앞의 사회과학서점을 뻔질나게 다니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와 그람시, 모택동의 저서에 매료되었고 지노비예프나 콘스탄티노프 따위의 소련아카데미에서 출판된 책들을 읽고 다녔다. 무엇을 의미하는 지보다는 이 해석 게임에서 질 수 없다는 오기 따위가 많은 것을 규정했던 것 같다. 물론 인간적 가치와 그 나이가 고민하게 될 실존의 문제가 뒤섞여 있었고, 적어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 역시도 내면 깊숙이 존재했지만 그 책들을 탐닉하고 누군가와 그 문제로 논쟁할 때 그 질서를 지배했던 것은 ‘질 수 없다’는 오기와 ‘내 생각’만의 편견이었다.
정말 전투적인 시절이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순정한 신념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는 일’을 논하거나 공부하는 일은 결코 전투와 다르지 않았다. 자르고 분석하고 연결하고 끼어 맞추고 그야말로 독하고, 평하고, 논하고, 술하는 모든 일은 전투였다. 그것은 많이 읽고, 많이 외우고, 많이 말하고, 많이 욕하는 일이었다. 더불어 그 신념으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충분히 설레고, 벅차 있었다. 물론 진지했고 엄숙했다. 그러나 죽어도 될 만큼의 신념을 지니는 일이란 대부분의 경우 자기보다 먼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고 자기를 대신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며, 좋은 경우라 할지라도 자기와 함께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인문학이란 분명 많은 이들의 열정과 고통과 성찰의 산물이다. 수없이 많은 규정에도 불구하고 인문성이란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무엇’일 것이다. 그러기에 ‘지식’과 ‘지혜’는 그 동일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이야기하듯, 계몽이란 탈마술화를 통해 대상에 대한 합리성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대상에 대한 제어와 지배의 욕망을 포함하는 것이다. 언제나 앎의 의지란 합리화를 통해 나와 세상에 대한 통찰의 욕망이며 지배와 힘의 의지인 것이다.
지식이란 진리를 가장한 힘이다. 쪼개고, 파헤치고, 꿰어 맞출 때 이미 지배에 대한 힘이 그리고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기에 지식을 쌓는 일은 죽음의 일이고, 지식을 버리는 일은 삶의 일이라 하지 않던가. 물론 합리적 인식, 즉 지식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식의 발전이 결국 문명의 역사였으며 문명의 질주에 대한 제어 역시도 지식의 역할이었다. 단지 지식의 질서에서 지배의 욕망을 걷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인문학은 성찰의 자리이다.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해야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안다는 것과 느낀다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은 다른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의 의미가 명확하게 분리될 수 없고 지식과 지혜의 의미도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인문성이란 그 성찰의 의미 속에서 삶의 지혜에 관한 것이다. 그러기에 지배와 복속의 근대, 남성적 의미가 아니고 나눔과 소통의 여성적 의미일 것이다. 제자인 사마우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인이란 어눌한 것이다(仁者基言也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