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환 육필시집 소례리 길
무밭에서
팔월대보름 앞에 무밭을 맨다/ 밭머리에 선들바람 지날 적마다/ 푸들푸들한 무청이 서늘한 빛을 뿜는데/ 한나절 속옷이 다 젖도록/ 호미 찍으며 앞으로 나간다// 평일 낮에는 도시락 싸서/ 대도시 중학교 글 가르치러 간다/ 한창 허벅지 탱탱한 녀석들이 쨍한 날을/ 종일 엉덩이 들썩이며 걸상에 붙어 있다/ 마음은 운동장에 가고 딱딱한 껍데기들만// 무 아닌 것들은 다 잡초로 분류된다/ 뽑아내고 찍어 낸 뒤 남은 녀석 중에서/ 잎살 여린 녀석은 솎아 무쳐 먹고/ 실한 녀석만 남겨 김장 무로 키워 올린다// 쉬는 시간은 건물이 통째로 운동장이다/ 녀석들은 세상모르고 뒤섞여 치고 박고 놀지만/ 입은 옷 얼굴빛 웃음 그늘에서 나는 벌써/ 갈리고 있는 그들의 길을 조심스레 읽고 있다// 잡풀 솎아 거름 주고 잘 다독거려 키운 녀석/ 거친 풀밭 돌밭에 혼자 던져진 녀석/ 끝내 밭둑 너머 거름 자리나 차지하고 말 녀석,/ …언제나 이럴밖에, 다른 길은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호미 움켜쥐고 책을 펴 들면서
≪배창환 육필시집 소례리 길≫, 102~105쪽
배창환은 시인이고 교사이고 촌놈이다.
시는 시인이 선 자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투박해도 건강하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