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 육필시집 카지아도 정거장
사랑보다 더 늙은/ 몸이라는 비애를 만지며/ 금곡리 저자거리의 저녁을 지나네/ 퇴근길에 가을비 술국을 끓이고/ 다방 아가씨 손톱을 깎고/ 수북하게 마음 안쪽을 분지르네/ 나의 비애로 제압해야 하는 가을이/ 없는 길을 끝내 가게 하면/ 내 사랑 감출 곳이 없네/ 죽산품과 젓갈류, 채소전들 사이/ 나는 시장에 쌓인 고향들을/ 하나씩 입속에 굴려 보며 지나네/ 팔려 간 고향이 되어 객지와 살고 있으니/ 고향을 의심하는 나는 외롭네/ 눈만 남은 사람처럼 마르네/ 2단 협립우산을 든/ 비애가 신문지로 싼 찐빵을 끼고/ 잠시 전봇대 뒤로 사라지네/ 모든 것의 타향 쪽으로 가지 않으면/ 나는 더욱 어두워질 것 같은데/ 한 치 앞을 모르는 상처 속에 사랑이 있으니/ 사랑은 끝없네/ 비 맞은 비애의 겨드랑이 사이/ 길을 찾을 수 없는 날의 저녁이/ 또 하나 쏜살같이 지나가네
≪황학주 육필시집 카지아도 정거장≫, 38~41쪽
마음은 분질러져 수북이 쌓이는데,
나의 비애로
가을을 제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