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결별하고 떠나겠다./ 밤새도록 뜨거운 울음으로 몸을 떨다가/ 다시 나와 걸어 보는 쓸쓸한 온천의 마을./ 바람은 서걱이며 마을의 불빛을 야위게 하고/ 어딜까, 따뜻한 것들이 등 보이며/ 어둠에 몸을 숨겨 가려는 곳은./ 괴로워하지 말아라, 말아라, 풀섶에서/ 풀벌레들이 울며 속삭이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분별의 귀를 세우고./ 그러나 돌아갈 때 돌아가는 것은/ 잔바람에 빈 가지만 남기는 잎사귀뿐 아니라/ 우리도 더 낮고 아늑한 잠을 찾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지상 어딜/ 말없이 헤매이며 찾아가야 한다고/ 풀벌레들은 울며 우리에게 말한다./ 만월의 달빛에 드러나는 가을 산마다/ 은어 떼로 솟구쳐 일어서는 물소리, 물소리들./ 한때의 격렬한 목마름이여/ 한때의 캄캄한 혼란이여/ 한때의 슬픔이여 이제는/ 결별하고 떠나리라 결심한 이 밤/ 끝내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장석주 육필시집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182~185쪽
결별하고 떠나려 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결별하고 떠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