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에 관해서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탈출에 관해서≫
김동규가 옮긴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의 ≪탈출에 관해서(De l’évasion)≫
타자, 무한한 자기만족
존재는 스스로 만족하려 하지만 만족하려는 욕구는 만족될 수 없다.
허위를 알아차린 존재는 수치와 구토를 느끼고 무력해진다.
자기 완결성, 곧 허위로부터의 탈출이 감행된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너를 만난다.
그것은 무한하다.
” ‘더-이상-아무것도-해 볼-것이-없음(il-n’y-a-plus-rien-à-faire)’이란, 어떤 행위도 쓸모없어진 한계상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보다 자세히 말해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은 오로지 이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뿐이라는, 바로 그 최상의 순간을 지시하고 있다.”
≪탈출에 관해서≫,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김동규 옮김, 59쪽
탈출의 주체는 누구인가?
존재의 구조에 갇힌 인간이다.
존재의 구조란?
절대적 자기만족, 완전성의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기만족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는?
허위이자 감금 상태이기 때문이다. 기존 서양철학에서 자아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 충만한 존재가 되려 한다. 자기만족을 위해 자아는 타자를 배제하고 자신의 존재를 침해받지 않으려는 ‘내적 평화’를 추구한다. 그러다 자기만족을 성취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탈출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수동적 체험이다.
자기만족이 허위인가?
그렇다.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욕구, 수치심, 구역질을 통해서 인식한다.
욕구는 어떻게 자기만족의 허위를 지적하는가?
인간은 욕구한다. 그러나 욕구는 충족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해 보자. 죽음은 죽음일 뿐 치울 수 없다. 따라서 욕구 충족의 범주에서는 자기만족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수치심은 어떤가?
욕구를 충족하면 쾌락을 느끼기 때문에 쾌락을 욕구의 목적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쾌락은 끝이 없기 때문에 욕구의 목적이 아니다. 욕구 충족과 함께하는 쾌락의 감정은 “기만적 탈출”이자 “실패한 탈출”이다. 이러한 실패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구역질은 언제 느끼는가?
수치심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수치심은 벌거벗음을 망각하지 못했을 때 생긴다. 곧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지 못했을 때 생긴다는 뜻이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감출 수 없으며 자기 자신에 못 박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치심보다 더 극단적인 불쾌감인 구역질을 느낀다.
구역질이 어떻게 탈출로 연결되는가?
구역질을 느낀 인간은 ‘그저 거기에 있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볼 것이 없는’ 무력한 현존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은 존재로부터 탈출을 감행하게 한다.
존재에서 탈출한 인간은 어디로 향하는가?
궁극적으로는 타자다. ‘존재와 다르게’, 존재를 넘어선 인간은 무한한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갇혀 있던 나를 벗어나는 일종의 자기 초월을 경험하게 된다. ≪탈출에 관해서≫는 레비나스의 초기 작품으로 자기 초월만 제시되어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수업을 듣고 1930년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현상학 연구자로 활동하다 1961년 <전체성과 무한>으로 국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심사한 얀켈레비치는 “당신이 여기 내 자리에 앉아야 했을 텐데요”라고 극찬했고, 리쾨르는 “이제부터는 그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비나스 철학의 바탕은 무엇인가?
반유대주의와 전쟁의 트라우마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교육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무드≫ 연구에 매진했다. “유대성(judéite)”은 그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요소였으며,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유를 펼치는 데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철학함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현상학’이다.
그의 철학은 무엇이 특별한가?
전체성을 강요하는 존재론 중심의 서양철학에 반기를 들고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정립하려 했다. 윤리 법칙이나 강령을 제시하는 대신 윤리의 초월적 가능 근거를 따져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자기성의 철학이 대세인 서양철학에서 ‘타자성의 철학’을 개진하게 되었다.
≪탈출에 관해서≫는 어떤 책인가?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으로 1940∼1950년대 형성된 그의 독창적인 초창기 사유를 선취한 책이다. 1935년 ≪철학 연구≫에 발표한 논문에다 그의 제자 자크 롤랑이 해설과 주석을 덧붙여 1982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어떻게 번역했는가?
자크 롤랑은 1997년 주석을 수정·보완했다. 나는 1982년판을 저본으로 삼아 레비나스의 글과 주석 전체를 옮겼고, 1998년 출간된 문고판을 참고해서 보완된 부분도 반영했다. 롤랑이 쓴 해설은 그 장황함과 난해함 때문에 싣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동규다.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