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2363호 | 2014년 12월 18일 발행
무지와 허영과 경솔
조주관이 옮긴 블라디미르 루킨(Владимир И. Лукин)의 ≪만물상(Щепетильник)≫

무지와 허영과 경솔
경박한 귀족, 위선자, 잡동사니 애호가, 타락한 법관, 프랑스심취광이 만물상을 찾는다.
입을 열면 무지, 눈을 뜨면 허영, 손을 들면 경솔이 쏟아진다.
러시아 이야기일까?

“셰페틸니크: 모두들 금세 저자가 아무런 지식도, 취향도 없다는 걸 알게 되겠군. 그리고 저자가 희극을 통해 노골적으로 비난했던 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겠지. 사모흐발로프, 그들이 당신을 구경거리로 만느는 건 시간문제야.
치스토세르도프: 저자의 자부심은 보기에 너무 역겹지 않은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칭찬받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군.
셰페틸니크: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게 될 겁니다. 이 속담이 적당하겠군요. “부르는 대로 같은 반응이 올 것이다.” 그가 욕을 하면, 남들도 그에게 같은 걸로 보답하죠. 만약 그가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배우고, 무언가 유용한 것을 쓴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를 사랑할 텐데.”
≪만물상≫, 블라디미르 루킨 지음, 조주관 옮김, 101쪽

두 사람이 말하는 사모흐발로프는 누구인가?
작가다. 자화자찬을 일삼는다. 러시아 문호 수마로코프를 빗댔다.

수마로코프를 비꼬는 이유는?
그는 루킨의 경쟁자였다. 외국 모델을 러시아 연극에 그대로 차용했는데 루킨은 이를 비판했다. 러시아 관객과 거리가 먼 낯선 인물과 소재를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만물상＞의 대상은 수마로코프뿐인가?
다양한 러시아 귀족이 등장한다. ＜만물상＞은 독특한 구성을 사용해 이들의 어리석음, 무지, 허영, 경솔함을 풍자했다.

구성의 독특함이란?
극중극 형식이다. 당대에는 실험을 감행한 셈이다. 귀족 치스토세르도프와 그의 조카는 극중극에서 관객 역할을 한다. 만물상이 극중극 무대가 되며 상점 주인 셰페틸니크와 손님들이 극중극 배우가 된다.

극중극 무대로 만물상을 택한 이유는 뭔가?
만물상이 물건을 하나 팔 때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결되고 다음 에피소드로 즉각 이행한다. 각계각층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는 확실히 단절된다.

어떻게 단절되는가?
에피소드는 만물상과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 숨어서 지켜보는 치스토르세프와 조카, 손님이 떠나면 그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전체 플롯도 희극의 단순성을 그대로 따른다.

희극의 단순성이란?
긍정적 인물과 부정적 인물을 대비해 선행과 악덕을 극명하게 대비한다. 치스토르세프와 조카와 만물상이 긍정, 손님들이 부정이다.

손님은 어떤 사람들인가?
경박한 귀족, 위선자, 잡동사니 애호가, 타락한 법관, 프랑스심취광이다. 당대 러시아 상류사회의 타락상을 보여 준다.

수마로코프를 비난해 루킨은 뭘 얻었나?
“위대한 작품을 헐뜯는 행위”라는 오명을 얻었다. 문학계와 극장계에서 루킨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고 여기에 예카테리나 여제도 동조한다.

외국 작품에 대한 루킨의 태도는 무엇이었나?
독자적 러시아 희곡 작품이 나타날 때까지는 외국 것을 모방하되, 러시아인의 성향, 러시아 풍속에 맞도록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물상＞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만물상＞도 모방인가?
영국 작가 로버트 도즐리의 희곡 ＜장난감 가게＞가 프랑스에서 ＜액세서리 가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를 개작한 것이다. 루킨은 러시아 상황에 맞게 작품 제목을 ‘만물상’으로 바꾸고 인물들도 러시아 귀족으로 설정했다.

블라디미르 루킨은 누구인가?
18세기 러시아 극작가이자 번역가다. 고위 관료였던 옐라긴이 이끄는 이른바 ‘옐라긴 그룹’에 속해 주로 프랑스어 작품을 번역하거나 개작했다.

‘옐라긴 그룹’이 연극에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프랑스 연극을 차용해 러시아 연극 발전을 도모했다. 특히 외국 작품들을 러시아 사정에 맞게 번안하면서 그 안에 민족적 풍습을 담아냈다. 루킨 외에도 폰비진, 옐차니노프 등이 이 그룹에 속했다.

어떻게 살다 갔나?
1737년 가난한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1762년에 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 원장이었던 라주몹스키의 개인 비서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해 번안 작품을 여러 편 출판했다. 당대 대문호 수마로코프를 비판한 일로 문단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1794년에 사망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조주관이다.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