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만필 천줄읽기
2416호 | 2015년 1월 23일 발행
17세기 조선의 문화 독립선언문
이복규가 뽑아 옮긴 김만중의 ≪서포만필(西浦漫筆) 천줄읽기≫
17세기 조선의 국문학
사람들은 중국의 지식과 마음이 최고라 여겼다.
조선의 것은 변두리 잡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우리 자신인 것을!
우리 것의 독자성 주장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서포 김만중이 있었다.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똑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과 통할 수 있지, 중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내버려 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서포만필≫, 김만중 지음, 이복규 옮김, 184쪽
≪서포만필≫은 어떤 책인가?
김만중이 지은 수필집이자 비평집이다. 김만중은 17세기에 활동했던 조선의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호는 서포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시에 얽힌 이야기와 비평이 실렸다. 소설이나 산문에 관한 글도 있다.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국어문학의 독자성과 가치를 옹호하고 중국 중심의 문화관인 주자주의와 화이론을 비판한다.
김만중은 주자주의의 무엇을 공격하는가?
주자가 변방 문화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인도의 불경이 ≪열자≫의 영향으로 쓰였다고 보았으며 각운은 중국인의 시에만 등장한다고 오해했다. 한문만 알 뿐 불경의 원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모르고 다른 나라의 시 텍스트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화이론(華夷論)이다. 세계 문화를 ‘화(華)’와 ‘이(夷)’ 두 가지로 보는 입장이다. ‘화’는 중화 문화고 ‘이’는 주변 문화다. 문자든 사상이든 종교든 중화 문화만 보편성이 있고 가치가 있으며 변방 ‘오랑캐’ 문화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랑캐 문화를 어떻게 보나?
비천하고 비속하며, 상스럽고 저열하다고 본다. 중화 문화로 교화해야 할 대상이다.
서포의 반격은?
정철의 <관동별곡>과 <전후사미인곡(前後思美人曲)>이 중국의 <이소>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당시 통념을 거부하고 국문학의 독자성에 주목했다.
국문학의 독자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어느 지역에나 문학이 존재한다고 했다. 말과 가락이 있다면 어디 말이든, 천지가 감동하고 귀신과 통한다. 우리나라 시골 사람의 민요가 양반 사대부의 한문학보다 더 진실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주장의 근거가 뭔가?
이항복의 시조가 광해군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일화를 근거로 제시했다. 광해군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귀양 가는 길에 지은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시조를 듣고 광해군이 누구 작품인지 물어 이항복이 지었다는 것을 알고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다. 서포는 “시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와 같다.”고 했다.
서포는 왜 이런 주장을 내세웠는가?
문학의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역사나 철학의 수단으로 여기던 시대에 그는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로부터 우리 문학관의 진보가 시작된다.
자율성 주장은 어디까지 갔는가?
수미일관하지는 못했다. 이중성도 보인다. ≪서포만필≫과 달리 ≪서포집≫에서는 주자주의를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일부 학자들은 ≪서포만필≫에서도 중국의 옛 한시 스타일을 선호하는 면이 있어 김만중을 혁신론자라 함부로 규정해선 안 된다고 한다. 김만중은 국문학이 한문학과 대등하거나 그보다 낫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끝내 시조나 가사 같은 우리말 시가를 창작하지 않았다.
혁신론자가 아닌가?
그렇다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대의 분위기가 엄중했고 우리말 문학 창작에는 역부족이었기에 한시를 쓰는 것으로 그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심으로는 민요, 가사, 시조 같은 우리말 시가가 더 소중하다고 고백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대에 서포는 유일한 자율성 논자인가?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 발문에서 이렇게 피력했다. “한시는 읊을 수는 있으나 노래할 수 없는 데 반해, 우리말 시가인 시조는 읊기도 하고 노래할 수도 있다.” 이 인식은 김만중과 상통한다.
김만중을 어떤 인물로 보는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두 가지 지향 사이에서 갈등한 진실한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새 시대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려는 선구적인 갈등과 고민을 한 인물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복규다. 서경대 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