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방송국
2514호 | 2015년 3월 30일 발행
한진만이 쓴 <<사라진 방송국>>
황태영이 그것을 본 순간
그것은 전율이었다.
라디오 장비 사러 미국에 간 방송기술자가 난생 처음 텔레비전을 본다.
얼마 뒤 서울 종로에 송신 안테나가 세워진다.
가시청 거리 15미터.
대한민국에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56년에 선보인 KORCAD의 HLKZ-TV는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다. 이 텔레비전 방송은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선 4번째로 개국한 것이다. ‘종로방송국’이라고도 불린 이 방송사의 개국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황태영이다.”
‘HLKZ-TV’, <<사라진 방송국>>, 14쪽.
황태영이 누구인가?
경성방송국의 방송기술자다. 단파방송 사건으로 해임된 후 미국 전자기업 RCA의 한국대리점을 경영하였다.
단파방송 사건?
조선방송협회의 한국인 기술부원이 개성 간이 방송소에서 미국의소리(VOA) 단파방송을 청취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200여 명의 한국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다.
텔레비전과의 첫 만남은?
한국전쟁 후 KBS라디오 시설 복구에 필요한 방송장비를 발주하기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이때 처음 TV 방송을 보게 되었다.
황태영의 반응은?
완전히 매료되었다. 직접 텔레비전 방송국을 운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뜻을 펴는가?
RCA 사장에게 TV 방송국에 필요한 장비를 외상으로 주문한다. 담보로 자신이 RCA 본사로부터 받을 수수료를 내걸었다.
외상 거래가 성사되는가?
그렇다. 방송국이 생기면 수상기도 팔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기술도 무료 제공하기로 했다. 수상기 200대와 시설자재 15만 달러어치를 외상으로 주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공보실과 재무부는 시기상조라고 여겼다. 방송 허가가 지체되자 황태영이 경무대에 직접 건의해 승낙을 받아냈다.
대한민국 텔레비전 개국 스토리가 상식 밖에서 이루어진 것 아닌가?
그렇다. 한 개인의 즉흥적 생각, 정부 부처의 무책임한 결정, RCA의 상업적 판단이 뒤섞여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생겼다.
최초의 방송은?
1956년 5월 12일이었다. 50평짜리 스튜디오에 카메라 2대, 영상기 2대, 비상발전시설 1대가 들어섰다. 동아빌딩 옥상에 높이 30미터의 송신 안테나를 세웠는데 가시청 거리가 반경 15미터였다.
그때 텔레비전 수상기가 얼마나 있었나?
서울 시내에 200~300대 있었을 것이다. 14인치 1대가 34만 환이었는데 쌀 한 가마가 1만8000환이었다.
그럼 시청자가 거의 없었다는 말인가?
방송국이 움직였다. 서울 시내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즉 사직공원, 파고다공원, 명동 입구, 서울역광장, 광화문네거리, 동대문운동장 등 총 20여 곳에 24인치 대형 수상기를 설치해 무료 방송을 보여 주었다.
프로그램은?
개국 당시에는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 방송으로 출발했다. 두 달 후인 7월부터는 방송 시간을 평일 3∼4시간, 주말 5시간으로 늘렸다. 뉴스, 주부·어린이 프로그램, 교양 강좌, 스포츠, 퀴즈, 공개 오락쇼, 드라마가 그때 편성된 프로그램들이다.
누가 만들었나?
외부 의존도가 높았다. 뉴스와 영화는 공보처, RCA, 주한미국공보원에서 주로 공급했다. 미국식 상업방송 편성을 답습했다. 광고주를 유치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광고가 붙었나?
그렇지 못했다. 그때는 전쟁 후라 경제 사정이 매우 열악했다. OB맥주, 크라운맥주, 경성전기회사, 청도제약, 수도피아노 정도가 광고주였다.
어떻게 버텼는가?
개국한 지 4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 책, <<사라진 방송국>>은 무엇을 다루나?
경성방송국, 동아방송, 라디오서울과 TBC라디오처럼 우리나라에서 생겼다가 사라진 방송국들의 의미를 새긴다.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에 설치한 방송국인 국군방송과 전문 방송국인 경찰방송국 등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함께 실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한진만이다. 강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