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맥
2589호 | 2015년 5월 15일 발행
1930년대 조선의 사랑법
추선진이 엮은 최정희의 ≪초판본 천맥≫
사랑을 빼앗는 현실
1930년대 조선은 사랑으로 뜨거웠다.
신여성은 교육 때문에 혼기가 늦었고
조혼의 풍습으로 남자들은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었다.
유일한 즐거움인 사랑을 빼앗는 현실.
자유연애의 불길이 퍼져 나간다.
연이는 다시 “선생님”을 불렀다. 소리가 떨렸다.
“선생님은 제 말을 못 알아들으십니다. 지금 제 하는 말슴은 애들 슬픔을 말하는 게 안얘요. 애들은 선생님 말슴과 같이 운명적이거니 하느님의 법규거니 하고 전보다 더 사랑하겠어요. 그런 자신두 지금 생기구 신념두 생겼어요. 그렇지만 그 외에두 세상엔 슬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슴이얘요. 힘으루두 어찌할 수 없구 이론으루두 어찌할 수 없는… 전 여기 올 때까진 선생님 말슴을 좋겠느라구 약속할 떄까진 아무것두 몰랐어요. 진호만이 나아짐 아무 고통두 슬픔두 없을 줄 알었어요. 그랬는데…”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그 뒤에 남은 말은 해낼 용기가 없었다. 침믁이 계속되였다. 그래도 하늘은 여전히 높으고 구름이 흐르고 짱아는 날랐다.
≪초판본 천맥≫, 최정희 지음, 추선진 엮음, 138쪽
연이가 말하는 “슬픈 일”이란?
성우 선생을 사랑하는 운명적인 슬픔이다. 그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것이 고통스럽다.
사랑이 왜 슬픔인가?
선생은 유부남이다. 연이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어떻게 시작된 사연인가?
성우 선생이 연이의 어릴 적 스승이다. 연이는 아들 진호를 데리고 보육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성우는 자신을 따뜻이 감싸고 진호를 올바로 끌어 주었다. 감사의 마음이 커졌고 사랑으로 발전했다.
연이는 왜 아들을 데리고 보육원에 간 것인가?
전 남편이 아들 진호를 남기고 죽었다. 연이는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허진영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의붓아들을 못마땅해한다. 진호도 점점 비뚤어져 간다. 견디다 못한 연이는 진영과 헤어지기로 하고 옥수정 보육원에 간다.
연이의 마음은 성우에게 닿는가?
성우의 마음속에는 보육원 아이들밖에 없다. 그러나 연이는 보육원 아이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아들 진호에 대한 마음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는다. 모성애의 한계를 절감하고 괴로워하던 연이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전념하겠다고 다짐한다.
모성애의 발전인가?
그렇지 않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최정희의 작품이 “모성애와 도덕성으로의 회귀”를 보여 준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연이가 모성애를 선택한 것은 성우 선생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욕망을 좇은 것인가?
그렇다. 윤리에 반하는 개인의 욕망을 따른다. “유일의 즐거움”인 사랑을 빼앗는 현실, “모성애와 도덕성으로의 회귀”를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이 작품의 메시지다. ‘결혼 제도를 넘어선 연애’를 모티브로 한 자전 소설 세 편이 모두 그렇다.
자전 소설 세 편은 무엇인가?
‘삼맥’이라 불리는 <지맥(地脈)>(1939), <인맥(人脈)>(1940), <천맥>(1941)이다. 작품 속에 투영된 최정희의 삶은 개별적인 체험으로서의 특수성만이 아니라 당시 ‘신여성’들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보편성도 가진다.
최정희의 체험이란 무엇인가?
아버지가 두 번째 부인을 얻어 집을 나가면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결혼 생활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영화감독 김유영과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으나, 시인 김동환을 만나게 되었다. 부인과 헤어진 김동환과 결혼하여 두 딸을 얻었으나, 전쟁 이후 김동환의 납북으로 홀로 남았다.
당시 신여성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나?
상대의 결혼 여부에 괘념치 않는 연애 행각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만연했다.
자유연애가 만연한 이유가 무엇인가?
당시에는 조혼의 풍습이 남아 있었고, 지식인들 사이에는 자유연애 사상이 퍼져 있었다. 교육을 받느라 혼기가 늦어진 신여성들의 연애 상대는 아내 있는 남성인 경우가 많았다.
<지맥(地脈)>과 <인맥(人脈)>은 무슨 이야기인가?
여자 주인공이 아내를 둔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갈등 상황에 빠지거나, 아내를 둔 남자와 동거를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어머니가 된 주인공들은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보면서 치열한 심리적 갈등 상황에 놓인다.
최정희에 대한 문단의 평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여성 문제를 형상화해 문단의 관심을 받았다. 많은 연구자가 내면 의식에 대한 감각적인 서술을 장점으로 꼽는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06년 함북 성진에서 태어났다. 1934년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강제 해산 및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유일한 여성 작가로 형무소에 수감됐다. 1937년 <조광>에 단편소설 <흉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단편집으로 ≪천맥(天脈)≫, ≪풍류 잡히는 마을≫, ≪바람 속에서≫, ≪찬란한 대낮≫, ≪탑돌이≫ 등이, 장편소설로 ≪녹색의 문≫, ≪별을 헤는 소녀들≫ 등이 있다. 1990년 별세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추선진이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