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계와 사랑
2603호 | 2015년 5월 25일 발행
시민 영웅의 시대 개막
이원양이 옮긴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의 ≪간계와 사랑(Kabale und Liebe)≫
시민 비극의 탄생
비극은 위대한 인간의 전유물이었다.
적어도 18세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그러나, 신흥 부르주아지, 시민계급의 성장을 막지 못한다.
이제 시민이 영웅인 시대가 열렸다.
루이제: (아버지와 눈짓을 교환하는 고통스러운 갈등을 한 다음 확고하고 단호하게) 제가 썼어요.
페르디난트: (놀라서 서 있다.) 루이제! 아냐! 내 영혼이 살아 있는 한!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순결한 사람도 고문대에서는 범하지도 않은 악행을 했다고 자백하는 거야. 내가 너무 격하게 물어보니까 거짓 자백을 했을 뿐이지?
루이제: 나는 진실을 자백했어요.
페르디난트: 아니야! 아냐! 아냐! 네가 쓴 게 아냐. 이건 전혀 너의 필적이 아냐. 혹시 그렇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망치는 것보다 필적을 모방하는 게 더 어려울 이유야 없지. 내게 진실을 말해, 루이제. 아냐, 아냐, 그러지 마. 네가 “네” 하고 대답하면 나는 끝장이 나는 거다. 거짓말을, 루이제. (소심하고 떨리는 어조로) 네가 이 편지를 썼는가?
루이제: 하나님께 맹세해요! 네!
≪간계와 사랑≫,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이원양 옮김, 172∼173쪽
무슨 편지인가?
루이제가 시종장에게 보낸 연서다. 연인 페르디난트 손에 들어간다. 그는 진위를 확인하려 하고 루이제는 자신이 쓴 게 맞다고 한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뭔가?
루이제 자신의 자유의사가 아니라 서기 부름의 간계 때문에 쓰게 된 편지다.
부름의 간계는 무엇인가?
루이제의 부모를 체포한다. 이들의 방면 조건으로 루이제에게 거짓 연애 편지를 쓰게 한다. 수신인은 시종장이다. 이 편지가 페르디난트에게 발각되게 한다. 수상의 바람대로 둘을 헤어지게 하려는 수작이다.
수상이 누군가?
페르디난트의 아버지, 영주의 대리자로서 최고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가다. 아들이 악사의 딸 루이제와 사랑하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그의 뜻은 무엇인가?
아들이 영주의 애첩 밀퍼드 부인과 위장 결혼을 하길 바란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아들에게 장차 후계자가 되는 길을 열어 주려는 거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의 서기 부름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런 음모를 꾸민다.
음모는 성공하는가?
페르디난트는 절망에 빠진다. 진실을 확인하려 하지만 루이제는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끔찍한 결말을 준비한다.
끔찍한 결말이란?
레몬 주스를 청한다. 루이제가 주스를 들고 오자 핑계를 만들어 방에 있던 사람들을 내보낸다. 그사이 독을 탄다. 그녀에게 레몬 주스를 먹이고 자신도 마신다.
여기가 끝인가?
아니다. 루이제는 레몬 주스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게 된다. 페르디난트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소식을 듣고 수상이 달려온다. 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미 두 사람의 생명은 구할 수 없다. 수상은 사법부에 자수한다.
어떤 작품인가?
독일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독일 무대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들 중 하나다. 시민 비극의 최고봉이다.
시민 비극이 뭔가?
시민계급을 주인공으로 한 비극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왕이나 귀족 같은 고귀한 신분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이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던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시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뒤집는 예술 혁명이 어떻게 가능해진 것인가?
18세기에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문화 주체로 등장했다. 시민들도 당당히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독일로 전파됐다. 독일 최초의 시민 비극은 레싱의 <미스 사라 샘슨>이었다. 실러도 그 영향을 받았다.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선례가 됐다.
<간계와 사랑>의 예술성은 어디서 찾아지는가?
실러가 당대에 유행하던 시민 비극에서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다. 그의 극작품 가운데 동시대 정치, 사회 문제를 다룬 유일한 희곡이다. 극적 사건이 치밀한 구성에 따라 전개되고 있어 희곡 작법의 교범이 될 만하다.
실러는 누구인가?
괴테와 함께 독일 ‘국민작가’라 불린다. 독일 고전문학을 꽃피운 불멸의 작가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원양이다. 한양대학교 독문과 명예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