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선 작품집
2609호 | 2015년 5월 28일 발행
손 끝의 가시 같은 당신의 양심
김유중이 엮은 ≪초판본 이범선 작품집≫
양심은 가시다
윤리는 나이롱 빤쯔 같은 것,
관습은 소녀 머리에 달린 리본 같은 것,
법률은 까마귀쯤 되면 상투 끝에 올라앉는 허수아비 같은 것이다.
그럼 양심은 뭔가?
별것 아니지만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가시 같은 것이다.
“네. 가시지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십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윤리. 그건 ‘나이롱’ ‘빤쯔’ 같은 것이죠. 입으나 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죠.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 위에 달린 리봉이라고나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법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다 되는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아니 무서워하기는커녕 그놈의 상투 끝에 턱 올라앉아서 썩은 흙을 쑤시던 더러운 주둥이를 쓱쓱 문질러도 별일 없거든요. 흥.”
<오발탄>, ≪초판본 이범선 작품집≫, 이범선 지음, 김유중 엮음, 154쪽
누구의 가치관인가?
영호가 형 철호에게 하는 말이다. 영호의 눈으로 보는 당대의 세태다.
형에게 저렇게 말하는 까닭이 뭔가?
가난하더라도 깨끗이 살자는 형의 태도가 답답하기 때문이다. “형님 하나 깨끗하기 위하여 치루는 식구들의 희생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크고 많단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영호네의 살림살이는 어떤가?
미친 어머니는 고향으로, 옛날로 돌아‘가자’라는 외침을 입에 달고 산다. 딸은 영양실조, 여동생 명숙은 양공주로 산다. 철호는 치료비가 없어 밤낮 쑤시는 충치를 방치한다. 영호는 상이군인으로 전장에서 돌아온 지 이태가 지나도록 직장을 못 잡고 저녁마다 술에 취해 들어온다.
동생 말을 듣고 철호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영호의 말은 억설이다. 철호는 전차 값이 없으면 종로서 집에까지 근 10리 길을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는 사람이다.
영호의 눈에 비친 형은 어떤 사람인가?
용기 없는 사람이다. 양심이란 가시는 사람이 무를수록 더 여물고 굳어진다는 것이 영호의 생각이다.
영호의 용기는 어떤 것인가?
그는 강도질로 체포된다. 은행 앞에서 월급 줄 돈 천오백만 환을 실은 ‘찦차’에 올라탄다. 권총을 들이대고 우이동 으슥한 숲으로 차를 몰게 한다. 운전수와 회사원을 버려두고 시내로 향한다.
왜 체포되었나?
영호의 말에 따르면 법률선까지는 무난히 뛰어넘었는데 인정선(人情線)에서 걸렸다.
‘인정선’에 걸렸다는 말이 뭘 뜻하는가?
공범을 냉정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지프차에 탄 괴한은 두 명이었다. 경찰이 잡았을 때 차에는 영호 혼자였다.
‘오발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철호는 자신을 마치 신의 실수로 튕겨져 나간 오발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양심·윤리·관습·법률을 저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만드는 열악한 삶의 환경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다.
당대 현실 조건의 부도덕성에 대한 고발인가?
작가의 휴머니즘도 볼 수 있다. 영호는 인정선에 걸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극한 상황에 내몰린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는 철호의 치통 역시 양심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치통과 양심의 관계가 뭔가?
동생은 수감되고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그러자 철호는 치통을 유발하는 양쪽 어금니를 다 뽑아 버린다. 이제 치통, 곧 양심을 버린 것이다.
<오발탄>은 작가 이범선에게 어떤 작품인가?
영광과 시련을 동시에 안겨 준 대표작이다. 유현목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더욱 널리 알려졌다. 군사 정권 치하에서 사상 불온 등을 이유로 교단에서 쫓겨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뭐가 불온하다는 것인가?
당시의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문단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평소의 작품 경향이나 사상 배경을 보면 사상 불온은 과도한 해석이라는 문단 내외의 중론이 확산된다. 그로 인해 불온의 혐의를 벗는다. 1962년 문공부 주최의 5월 문예상 장려상을 받는다. 전후 한국 대표 단편 소설로 문학사에 자리 잡는다.
그는 어떻게 살다 갔나?
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월남했다. 1955년, 단편소설 <암표>와 <일요일>을 ≪현대문학≫에 김동리의 추천을 통해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했다.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며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됐다. 다음 해 뇌일혈로 쓰러져 생을 마쳤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유중이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