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두발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 7.
크리바, 스스로 거세되는 욕망
차페크는 우리를 해발 오백 미터 남짓한 산길로 안내한다. 지금도 인구 팔백 명을 넘지 못하는, 교회와 초등학교가 전부인, 기억할 만한 산업도 유물도 내놓지 못하는 슬로바키아의 벽촌 크리바다. 주인공 호르두발은 집을 나와 뒷산에 오른다. 소를 친다. 소가 된다. 욕망은 스스로 거세된다. 먼지처럼 가벼워진 그가 땅과 하늘에서 무엇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일이 왜 이곳에서 일어났을까?
갑자기, 너무나 갑자기 그는 고향 집엘 왔다. 단지 저기 저 돌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도랑을 한 발짝 건너뛰기만 했을 뿐인데 도랑은 사방에서 그를 압도한다. 그렇다. 그 울퉁불퉁한 돌 도랑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가시나무 덤불 또한 거기 있었다. 이 덤불은 그때 목동들이 불을 질러서 그슬리기도 했지. 골짜기에는 다시 현삼과(玄蔘科)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있고, 길섶에는 마른 잔디와 백리향(百里香)이 우거져 있으며, 저기 저 월귤나무 우거진 옥돌 바위, 용담초(龍膽草), 노간주나무 그리고 숲. 여기저기 말라붙은 쇠똥들과 황폐한 건초 막사. 여기는 더 이상 아메리카도 아니고 8년의 세월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그때 그대로다. 엉겅퀴의 꼭대기에서 색깔을 뽐내고 앉아 있는 딱정벌레, 함치르르한 목초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들의 방울 소리, 크리바 뒤로 뻗은 고갯길, 사초속(莎草屬)의 갈색 잔디 덤불과 집으로 이어지는 길… 아메리카라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가죽 밑창에 가죽 밴드를 둘러 만든 수제 신발을 신은 산사나이들의 경쾌한 발걸음이 무수히 밟고 지나간 길, 빵 굽는 오븐처럼 따뜻하면서 소들의 냄새와 숲의 냄새로 가득 찬 길, 골짜기를 따라 내리뻗은 길, 수많은 가축들이 밟고 지나간 울퉁불퉁한 돌길, 듬성듬성한 바위를 따라 나 있는 습지 길, 오오, 하느님, 얼마나 근사한 도보 길입니까. 시냇물처럼 거침이 없다가도 부드러운 잔디 길을 만들기도 하고, 발아래로 자갈이 부서지기도 하다가 습지 길을 따라 철벅거리기도 하고, 나무숲을 지나서 꼬부랑길이 되기도 하는 길. 천만의 말씀이지만, 존스타운에서처럼 당신이 걸을 때마다 발아래에서 울리는 마찰음이 귀청을 진동하는 보도블록 포장길은 전혀 없고, 거기와 같은 난간들도 없고, 광산으로 향하는 남정네들의 무리도 없고, 더욱이 사람도 없고, 사람의 아무런 흔적도 없고, 오로지 골짜기를 따라 뻗어 있기만 한 길, 개울, 소들의 방울 소리, 고향으로 향하는 길, 집으로 이어지는 내리받이길, 송아지들의 작은 방울 소리 그리고 개울가의 푸른 바꽃….
≪호르두발≫(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3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