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헨리 5세>>
우리가 전사한다면
1600년 출판 등록된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Henry V)≫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과 아쟁쿠르 전투, 그리고 영국이 가장 사랑한 왕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김종환은 이 오래된 희곡을 한국의 독자에게 신선하게 전달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적절한 연극 대본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호흡 단위를 고려했다. 원문 1행은 대체로 이 번역의 2행에 해당한다. 둘째,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물명과 프랑스 인명은 영어명이 아니라 가능하면 원명을 찾아 적었다. 셋째, 가독성과 독서 시간, 혹은 공연 시간을 염두에 두었다. 스토리 전개에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부분을 삭제하고 축약했다. 주로 삭제한 부분은 폴스타프와 놀던 피스톨, 님, 바돌프 등 군소 인물들의 긴 대사와 베이츠, 코트, 윌리엄스 등 영국군 병사들의 대사다. 플루얼렌, 가우어 등의 영국군 장교들의 대사도 줄여서 제시한다. 그러나 주요 등장인물의 주요 대사가 삭제된 경우는 거의 없다. 넷째,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 해설과
각주에서 비교적 자세한 역사적 배경을 제시했다.
전투를 앞둔 왕이 자신의 전사들을 고무하는 연설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는 헨리5세의 아쟁쿠르 출정사를 연극 속 셰익스피어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우리가 전사한다면
조국의 손실이 우리로서 족하고
살아남는다면 군대가 적을수록 영광의 몫은 크오.
신께 맹세하지만, 한 명도 더 바라지 마시오.
맹세하지만, 난 황금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소.
누구나 내 돈으로 먹고 마셔도 전혀 개의치 않소.
사람들이 내 옷을 입어도 상관없소.
그런 외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없소.
하지만 명예를 탐하는 것이 죄라면,
나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죄가 큰 사람이오.
그러니 제발 본국의 지원병을 바라지 마시오.
반드시 큰 명예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소.
한 명이라도 더 늘려서 내 몫을 줄이고 싶지 않소.
그러니 부탁이오.
단 한 명의 지원군도 바라지 마시오.
웨스트모어랜드, 차라리 전군에 이렇게 알리시오.
진심으로 이 전투에 가담하기 싫은 자는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귀국 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돌아갈 여비도 주겠다고 하시오.
우리와 함께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와
이 전투를 치르면서 함께 죽고 싶지는 않소.
오늘은 크리스피언 축제일이오.
오늘 살아서 무사히 고국에 돌아가는 자들은,
매년 크리스피언 축제 때마다
사람들 입에 그 이름이 오르내려 흥분될 거요.
늙어 이날을 맞게 되는 이들은 매년 그 전야제에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내일은 성 크리스피언 축제일”이라고 말할 거요.
그러고는 옷소매를 걷어붙여
상처 자국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할 거요.
“이건 성 크리스피언 축제일에 입은 상처요”라고.
늙으면 사람들은 잘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건 다 잊을지라도,
이날 세웠던 공훈만은 반드시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때는 우리의 이름들이
평소에 쓰는 낯익은 말처럼 입에 오르게 되어,
헨리 왕, 베드포드, 엑서터, 워릭,
탈봇, 솔즈베리, 글로스터 등의 이름들이,
이웃 사람들과 주고받는 술잔 속에
생생히 되살아나게 될 것이오.
선한 아버지는 우리 얘기를
아들에게 가르칠 것이고
오늘부터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성 크리스피언 축제일이 올 때마다
우리 모두 이야기 속에 기억될 것이오.
우리는 소수, 행복한 소수이자 형제 군단이오.
오늘 나와 함께 피 흘리는 사람은 앞으로
내 형제가 될 것이고, 신분이 비천한 사람도
오늘부터는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오.
그리고 지금 조국의 잠자리에서
단잠을 자는 사람들은 훗날
이곳에서 함께 싸우지 않은 것을 스스로 저주하고
이날 우리와 함께 싸운 용사들의
무훈을 들을 때마다
남자의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할 것이오.
<<헨리 5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117~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