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카를로스
이성은 이상이 아니었다
왕과 왕자 사이의 경쟁과 대립, 아버지 펠리페와 아들 카를로스 사이에 왕자의 약혼녀였다 왕비가 된 계모가 있었으므로 갈등은 더욱 복잡하다. 왕은 그런 사람이었고 왕자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포사가 나타난다. 이상주의자, 냉정한 논리와 철저한 의지로 무장한 인간주의자, 감성의 유혹을 물리친 합리주의자는 왕과 왕자의 친구가 된다. 목적은 단 하나. 권력을 가진자를 유혹해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권력만이 인간을 동물의 비극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과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한 후작 포사가 왕비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자.
왕비, 포사 후작
왕비 아, 후작, 마침내. 오셔서 다행이오.
후작 (창백하고 일그러진 얼굴, 떨리는 목소리. 이 장면 내내 엄숙하고 깊은 심적 동요를 보인다.) 마마 혼자이십니까? 옆방에서 아무도 우릴 엿들을 수 없나요?
왕비 아무도 없소. 왜요? 무슨 소식을 가져온 것이오? (그를 자세히 살펴보고 놀라서 멈칫하며)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구려. 왜 그러오? 날 떨게 하는구려, 후작. 얼굴이 죽어 가는 사람처럼 일그러졌구려.
후작 잠작건대 이미 아실 겁니다.
왕비 왕자가 체포되었다는 걸, 게다가 그대가 그랬다는 걸 들었소. 그게 사실이오? 그대 말고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믿고 싶지 않았소.
후작 사실입니다.
왕비 그대 손으로?
후작 제 손으로.
왕비 (의심쩍다는 듯 얼마간 그를 바라본다.) 비록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대의 조처를 존중하오. 하지만 이번만은 불안한 여자를 용서하시오. 너무 과감한 놀음을 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오.
후작 제가 졌습니다.
왕비 맙소사!
후작 안심하십시오, 왕비마마. 왕자의 안전을 위한 조처는 이미 취해 놓았습니다. 저 자신이 의도했던 일에서 졌습니다.
왕비 무슨 말을 듣게 될 것인가. 하느님!
후작 그도 그럴 것이, 미심쩍은 패에 모든 걸 걸라고 한 사람이 있었나요? 그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하늘과 놀음을 하라고 한 사람이?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우연의 육중한 키를 잡겠다고 나서는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아, 제가 좌절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지금 저한테 그걸 요구한답니까! 이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만큼 귀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색한 손에서 벌써 제 생명의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지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왕비 하느님의 손에서? 그 무슨 엄숙한 어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만 날 놀라게 하는구려.
후작 왕자님은 구조되었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뿐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왕자님이 시간을 아껴야 할 텐데요. 오늘 밤 안으로 마드리드를 떠나셔야 합니다.
왕비 이 밤에?
후작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저희 우정의 피난처였던 카르투지오 교단 수도원에서 역마차가 왕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승의 행운이 제게 준 재물을 바꾼 어음이 여기 있습니다. 부족한 건 마마께서 채워 주십시오. 이 가슴엔 아직 벗에게 해 줄 말이, 벗이 알아야 할 게 많이 있습니다만 직접 만나서 모든 걸 합의할 틈이 없기 십상입니다. 마마께서 오늘 저녁에 왕자를 만나실 테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왕비 후작,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분명하게 설명해 주시오.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은 하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후작 고백할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마께 털어놓겠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나 주어진 행운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저는 왕의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단 한 사람에게 바쳐진 제 가슴은 온 세상을 품었습니다. 왕자의 영혼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천국을 만들었습니다. 오, 제 꿈은 아름다웠지요. 그러나 섭리는 무르익기 전에 저의 아름다운 농장에서 절 불러내려고 작정하고 말았습니다. 왕자는 곧 절 잃게 되었습니다. 벗은 연인 안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 여기, 여기에, 이 거룩한 제단에, 왕비마마의 가슴속에 제 귀중한 마지막 유언을 내려놓겠습니다. 제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면 왕자는 여기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얼굴을 돌린다. 울음이 그의 목소리를 막는다.)
왕비 그건 죽어 가는 사람의 말이오. 그게 그저 끓어오르는 피의 영향 때문이길 바라오. 아니면 그 말에 의미가 담겨 있나요?
후작 (정신을 가다듬으려 하고 좀 더 확고한 어조로 말을 계속한다.) 우리가 꿈에 젖어 있던 시절 하늘에 걸고 했던 맹세를 생각하라고 왕자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 편에서는 맹세를 지켰고 죽을 때까지 왕자에게 신의를 지켰습니다. 이제 왕자가 맹세를 지킬 차례입니다.
왕비 죽을 때까지?
후작 왕자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꿈의 그림을, 새로운 국가라는 대담한 꿈의 그림을, 우정의 거룩한 산물을 실현해야 한다고. 그 원석에 손을 대기 시작해야 합니다. 완성하든 좌절하든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수해야 합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면 섭리는 카를로스와 같은 왕자를 그의 것과 같은 옥좌에 앉힐 것이고 그 새로운 총아에게 동일한 열정을 불어넣어 줄 겁니다. 왕자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어른이 된 다음에도 어렸을 때의 꿈을 존중하고, 칭송이 자자한 이성이란 치명적인 벌레에게 연약한 천상의 꽃의 가슴을 열어 주지 말라고. 먼지 같은 지혜가 하늘의 딸인 열정을 모독하더라도 현혹되지 말라고. 제가 왕자에게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왕비 후작, 왜 그러시오? 그리고 그 말은….
후작 그리고 제가 인간의 행복을 왕자의 영혼에 맡긴다는 걸, 제가 죽어 가면서 그걸 요구하고 또 그럴 권리가 있다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이 나라에 새로운 아침을 가져올 힘이 저한테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저한테 마음을 주셨거든요. 절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제가 옥새를 가지고 있고 알바 같은 신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을 멈추고 한동안 말없이 왕비를 바라본다.) 우시는군요. 그 눈물을 압니다, 아름다운 영혼이지요. 기쁨이 흘리게 하는 눈물입니다. 그러나 지나갔습니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왕자, 아니면 저. 선택은 빨라야 했고 무서웠습니다. 하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고 제가 그 한 사람이길 바랍니다. 차라리 제가…. 더는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왕비 이제야, 이제야 마침내 그대를 이해하기 시작했소. 불운한 사람, 무슨 일을 한 것이오?
후작 밝은 여름날을 살리기 위해 짧은 저녁 시간을 바친 겁니다. 저는 폐하를 버렸습니다. 제가 폐하께 어떤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딱딱하게 굳어 버린 땅에서는 제 장미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유럽의 운명은 제 위대한 벗 안에서 익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스페인을 그 벗에게 맡깁니다. 그때까지는 펠리페 왕 밑에서 피를 흘려야겠지요. 하지만 재앙입니다. 만약 제가 후회하게 된다면, 잘못 선택했다면 제게도 재앙이고 벗에게도 재앙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왕자를 압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제 보증인은 왕비마마십니다. (잠시 침묵한 후) 저는 가장 불행한 열정인 그 사랑이 왕자의 가슴속에서 싹트고 뿌리내리는 걸 보았습니다. 그때 그걸 저지하는 건 제 능력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제 눈에 불행하게 보이지 않은 그 사랑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세상은 다르게 판단하겠지요.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절 질책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죽음밖에 보지 못하는 곳에서 저는 생명을 보았던 겁니다. 그 가망 없는 불꽃에서 저는 일찍이 희망의 찬란한 광선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왕자를 탁월한 사람으로 이끌고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습니다. 죽음이 제게 그림을 거부했고, 언어가 말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왕자의 눈을 이것으로 유도했습니다. 저의 이끌음은 왕자에게 사랑의 대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왕비 후작, 벗이 그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날 잊고 말았구려. 날 왕자의 천사로 만들었고 왕자에게 미덕을 무기로 주었던 만큼 내가 여성의 모든 속성에서 벗어났다고 진정으로 믿었나요? 우리가 열정을 그런 이름으로 격상한다면 우리 가슴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는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 같군요.
후작 모든 여자들에게는 그렇겠지만 한 여인만은 아닙니다. 한 여인만은 믿습니다. 아니면 가장 고상한 욕망마저 수치로 여기시는 마마께서 영웅적 미덕의 창조자가 되는 것도 수치로 생각하시겠습니까? 에스쿠리알 궁의 예수 찬양 그림이 그걸 보는 화가에게 영원성을 느끼게 해 준다면 그게 펠리페 왕과 무슨 상관입니까? 현악기에 잠들어 있는 달콤한 화음은 귀가 틔지 않은 채 그걸 사서 보관하는 자의 것이겠습니까? 그자는 그걸 박살 낼 권리는 샀으나 멋진 소리를 불러내고 노래의 환희 속에 잠겨 들 예술은 사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현인들을 위해 존재하고 아름다움은 느끼는 가슴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 둘은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어떤 비겁한 선입견도 이 믿음을 깨트리지 못합니다. 약속해 주십시오. 왕자를 영원히 사랑하시겠다고, 인간의 두려움이나 옳지 않은 영웅적 용기에 의해 무가치한 부인으로 이끌리지 않고 변함없이 영원히 왕자를 사랑하시겠다고. 그걸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마마, 제 손을 잡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왕비 약속하지요. 내 가슴이 홀로 영원히 내 사랑의 심판자가 될 것이오.
후작 (손을 거두며) 이제 안심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할 일은 다했습니다. (왕비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가려고 한다.)
왕비 (말없이 눈으로 전송한다.) 가시는군요, 후작. 우리가 언제, 얼마나 빨리 다시 만날지 말해 주지도 않고.
후작 (다시 돌아온다. 외면한 채) 틀림없이 다시 만날 겁니다.
왕비 그대 말을 알아들었소. 포사…. 제대로 이해했소. 어째서 그렇게 했소?
후작 왕자 아니면 접니다.
왕비 안 돼요, 안 돼! 그대는 숭고하다고 부르는 이 행위로 뛰어들었소. 부디 부인하지 마시오. 그대를 알아요. 그대는 오래전부터 그걸 갈망했어요. 수많은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그대의 자부심만 충족되면 그만이오. 아, 지금, 이제 그대를 똑바로 알게 되었소. 그대는 오로지 경탄만을 노렸소.
후작 (당황해서 방백) 이건 아닌데.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왕비 (침묵한 후) 후작, 살아날 길은 없나요?
후작 없습니다.
왕비 없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방법이 없나요? 나를 통해서도?
후작 마마를 통해서도 없습니다.
왕비 날 절반밖에 모르는군요. 나는 용기가 있어요.
후작 저도 압니다.
왕비 그런데도 살아날 길이 없어요?
후작 없습니다.
왕비 (그를 떠나 얼굴을 가린다.) 가시오. 더는 어떤 남자도 존경하지 않겠어요.
후작 (아주 격렬한 동작으로 왕비 앞에 엎드린다.) 왕비마마! 오, 하느님! 삶은 아름답습니다.
(후작이 벌떡 일어나 황급히 떠나간다. 왕비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